스페인의 간식시간, 메리엔다

카스테라, 커피우유, 케잌이 있는 풍경

by 은수자

나른한 오후, 대리석 바닥에 길게 드러눕는 스페인의 씨에스타 풍경이 눈부실 때, 도시의 소음조차 나른한 리듬으로 변하는 '메리엔다(Merienda, 간식 시간)'가 찾아오면 우리는 비로소 삶의 쉼표 하나를 찍습니다.


스페인의 카페 테이블 위에서 만나는 세 가지 이야기—카스테라의 원형인 비스코초, 영혼을 데우는 카페 콘 레체, 그리고 달콤한 일탈 파스텔에 관한 에세이를 전해드립니다.


오후 4시, 태양의 나라가 건네는 달콤한 위로


1. 카스테라의 먼 조상, 비스코초(Bizcocho)

우리가 흔히 일본의 간식으로 알고 있는 카스테라의 뿌리는 사실 스페인의 **'판 데 카스티야(Pan de Castilla, 카스티야의 빵)'**에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이를 보통 **비스코초(Bizcocho)**라 부르는데, 화려한 크림이나 장식 없이 오직 달걀과 밀가루, 설탕만으로 구워낸 이 소박한 빵은 대항해 시대 선원들의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스페인의 비스코초는 부드럽기보다는 오히려 포슬포슬하고 담백합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그 정직한 맛은 화려한 디저트들에 치여 잊고 살았던 '기본'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곤 하죠.


한국인에게 '카스테라'는 단순한 빵을 넘어 어린 시절의 추억이자 부드러움의 대명사죠. 그 기원을 따라가면 스페인의 옛 왕국, **카스티야(Castilla)**에 닿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카스테라'라는 이름은 사실 **"카스티야 왕국의 빵(Pão de Castela)"**이라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과 교류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 나가사키에 이 빵을 전하며 "이게 무슨 빵이냐"는 질문에 **"카스티야(스페인의 옛 왕국 명칭)의 빵이다"**라고 답한 것이 오늘날의 이름이 된 것이죠. 카스테라는 본질적으로 **'스페인식 계란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귀족의 빵에서 국민의 빵으로: 당시 귀한 식재료였던 달걀과 설탕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이 빵은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이 즐기던 별미였습니다.


스페인식 비법: 한국의 카스테라는 일본을 거치며 촉촉하고 찰진 식감으로 변모했지만, 스페인의 원형인 **비스코초(Bizcocho)**는 달걀 거품만으로 부풀려 훨씬 포슬포슬하고 담백합니다.


계란의 풍미: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한 달걀 향은 예나 지금이나 스페인 가정집 부엌에서 풍겨 나오는 가장 정겨운 냄새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그 노랗고 폭신한 속살은, 수백 년 전 스페인 카스티야 벌판을 달리던 여행자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챙겼던 든든한 '계란 빵'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셈입니다.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소박한 '계란 빵'이었던 비스코초가 동양의 작은 섬나라 일본에 닿기까지는 16세기 대항해 시대라는 거대한 역사의 파도가 있었습니다.


(1) 낯선 이방인이 건넨 첫 번째 선물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 항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우유, 설탕, 계란을 넣어 만든 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충격적인 음식이었죠. 선교사들과 상인들은 포교와 교역을 위해 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을 선물로 건넸습니다. 이때 일본인들이 "이 빵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Pão de Castela(카스티야 왕국의 빵)"**라고 답했고, 이 발음이 일본식으로 굳어져 **'카스텔라(カステラ)'**가 되었습니다.


(2) 화려한 변신: 스페인 식감 vs 일본 식감

흥미로운 점은 일본으로 건너간 카스텔라가 현지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페인의 비스코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페인 원형은 버터나 기름을 쓰지 않고 오직 달걀 거품으로만 부풀려 포슬포슬하고 가벼운, 다소 건조한 느낌의 빵입니다. 커피나 우유에 적셔 먹기에 최적화된 식감이죠.


일본의 카스텔라: 일본인들은 여기에 **'미린(요리용 술)'**이나 **'물엿(미즈아메)'**을 더했습니다. 이를 통해 스페인 원형에는 없는 쫀득하고 촉촉한 식감을 만들어냈죠. 우리가 흔히 아는 '입에 착 감기는' 카스테라는 사실 일본에서 완성된 스타일입니다.


(3) 나가사키의 자부심이 되다

당시 일본에서 설탕은 매우 귀한 약재이자 사치품이었습니다. 설탕을 듬뿍 사용한 카스텔라는 에도 시대 귀족들이나 즐길 수 있는 최고급 디저트였죠. 나가사키의 장인들은 오븐이 없던 시절, 위아래로 숯불을 놓아 굽는 독특한 방식을 개발하며 오늘날 '나가사키 카스텔라'라는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했습니다.

스페인의 거친 벌판에서 태어난 판 데 카스티야가 포르투갈 상인의 배를 타고 일본에 전해져 촉촉한 카스텔라로 피어나기까지. 이 빵 한 조각에는 서양의 재료와 동양의 섬세한 기술이 만난 수백 년의 시간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의 빵집에서 만나는 카스테라가 유독 친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 빵이 품고 있는 길고 긴 여행의 서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완벽한 온도,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

이 담백한 비스코초를 가장 완벽하게 즐기는 방법은 바로 카페 콘 레체 한 잔에 적셔 먹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카페라떼보다 조금 더 진하고, 프랑스의 카페오레보다 조금 더 뜨거운 이 커피는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비율의 미학: 진하게 내려진 에스프레소와 부드럽게 데워진 우유가 1:1에 가까운 비율로 만납니다.

온기: 투명한 유리잔(Vaso)에 담겨 나오는 카페 콘 레체는 손바닥을 통해 그 온기를 온전히 전해줍니다.

비스코초 한 조각을 이 따스한 커피 속에 툭, 담갔다가 입안으로 가져가는 순간, 빵의 기공 사이로 스며든 커피 향이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는 무언의 다독임입니다.


유럽의 아침을 여는 두 주인공, 스페인의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카페 오 레(Café au Lait)**가 있죠. 언뜻 보기엔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두 이름 모두 '우유를 곁들인 커피'라는 뜻이지만, 그 잔을 손에 쥐었을 때 전해지는 미묘한 온도와 질감은 두 나라의 성격만큼이나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스페인의 CAFE CON LECHE VS 프랑스의 CAFE AU LAIT


(1) 묵직한 열정의 스페인, 카페 콘 레체

스페인의 카페 콘 레체는 마치 스페인의 태양처럼 뜨겁고 진합니다.

강렬한 베이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아주 진하게 추출한 커피를 사용합니다.


비율의 조화: 보통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1:1에 가깝게 섞는데, 우유를 아주 뜨겁게 데워 냅니다.


일상의 투박함: 세련된 도자기 잔보다는 두툼한 유리잔(Vaso)에 담겨 나올 때가 많습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짙은 갈색과 하얀 우유의 섞임은, 꾸밈없는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닮아 있죠.


(2) 부드러운 낭만의 프랑스, 카페 오 레

반면 프랑스의 카페 오 레는 조금 더 여유롭고 부드러운 아침의 풍경을 그려냅니다.

은은한 베이스: 에스프레소보다는 드립 방식이나 프렌치 프레스 등으로 내린 조금 더 연한 커피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접의 미학: 프랑스의 카페 오 레는 손잡이가 없는 커다란 사발 모양의 **'볼(Bol)'**에 담아 마시는 것이 전통입니다.

적셔 먹는 문화: 커다란 볼에 담긴 따뜻한 우유 커피에 갓 구운 바게트나 크로아상을 푹 찍어 먹는 행위, 그것이 프랑스식 아침의 완성입니다.


(3) 닮은 듯 다른 두 나라의 위로

카페 콘 레체가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들이켜는 **'열정의 연료'**라면, 카페 오 레는 잠 덜 깬 아침을 부드럽게 깨우는 **'낭만적인 서곡'**에 가깝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바(Bar)에 서서 바리스타와 짧은 수다를 떨며 뜨거운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단숨에 비워내고, 프랑스 사람들은 커다란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아침을 맞이합니다.

국경을 사이에 둔 이 두 잔의 커피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쓰디쓴 인생(커피)을 따스한 온정(우유)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것. 오늘 당신의 아침은 스페인식의 뜨거운 열정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프랑스식의 부드러운 위로가 필요한가요?




3. 일상의 작은 축제, 파스텔(Pastel)

스페인에서 **파스텔(Pastel)**은 단순한 케이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일요일 점심 식사 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누는 커다란 케이크일 수도 있고, 퇴근길 나를 위해 고른 작은 조각 케이크일 수도 있죠.

스페인의 파스텔은 유독 달콤합니다. 설탕에 절인 과일이나 진한 커스터드 크림이 듬뿍 들어간 그 달콤함은,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강렬한 단맛이야말로 "인생은 즐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스페인식 낙천주의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생일에 미역국이 있고, 집안의 대소사에 시루떡과 잔치떡이 빠지지 않듯, 스페인 사람들의 삶의 마디마디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소울푸드'는 단연 **파스텔(Pastel)**입니다.

우리에게 파스텔은 그저 예쁜 케이크나 디저트 정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것은 **'축하할 일이 생겼다'**는 기분 좋은 신호이자, 소중한 사람들과 둘러앉아 나누는 정(情)의 상징입니다.


(1) 한국의 떡, 스페인의 파스텔

한국에서 이사한 날 이웃과 떡을 나누고, 아기의 백일을 축하하며 백설기를 찌는 풍경은 스페인의 '파스텔레리아(Pastelería, 과자점)' 풍경과 꼭 닮아 있습니다. 일요일 점심, 온 가족이 모이는 식사 자리에 아버지가 들고 오는 커다란 파스텔 상자는 그 자체로 축제의 시작입니다.

결혼식, 세례식, 혹은 마을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축제일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파스텔이 상 위에 오릅니다. 쫀득한 떡이 우리네 찰진 정을 나타낸다면, 파스텔의 진한 크림과 달콤한 시럽은 스페인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뜨겁고 달콤한 열정을 닮아 있습니다.


(2) "인생은 쓰고, 파스텔은 달다"

스페인의 파스텔이 유독 달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하려는 장치일지도 모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고된 노동을 마친 뒤, 혹은 인생의 파도를 넘고 맞이한 기쁜 날, 그들은 가장 화려하고 달콤한 파스텔 한 입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마요르카의 엔사이마다(Ensaimada): 소용돌이 모양의 이 빵은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처럼 넉넉합니다.

산티아고의 타르타 데 산티아고(Tarta de Santiago): 아몬드 가루로 만든 이 케이크는 순례길의 끝에서 만나는 위로의 맛이죠.


(3) 마음을 전하는 가장 달콤한 언어

"Pastel"이라는 단어 속에는 단순히 밀가루와 설탕의 조합 그 이상의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약속입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정성스럽게 포장된 파스텔 상자를 건네는 것은, 한국인이 갓 구운 떡을 이웃에게 돌리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결국 파스텔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단순한 후식이 아닙니다. 가장 슬픈 날에 는 위로가 되고, 가장 기쁜 날에는 환희가 되는, 입안 가득 번지는 행복의 조각입니다.


당신의 오후, 카페에 잠시 앉아 즐기게 되는 '메리엔다'는 어떤 모습인가요?

스페인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어떤 달콤함을 나누느냐에 있다고 말이죠.

포슬포슬한 비스코초 한 조각과 온기 가득한 카페 콘 레체, 그리고 가끔은 사치스러운 파스텔 한 입.

오늘 당신의 오후에도 이런 작은 여유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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