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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미스유니버스 vs 할머니 비서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2000년도쯤 상사들을 따라 짧은 미국 출장을 갔었다. 3일간의 짧은 출장이어서 크게 부담이 없어 좋았었다. 지원부서라서 출장이 많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나는 직장생활에서 제일 싫은 게 출장이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게 며칠 이상 지속되면 너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자니 더더욱 도착 첫날은 체력이 바닥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출장 가서 나만큼 호텔비 원가를 알차게 뽑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체크인 시간 되자마자 입실, 뜨거운 물로 샤워 충분히 하고, 저녁 먹고는 바로 올라와 쉬며 영화도 보고 바로 잠들어 다음 날까지 숙면하니 말이다. 출장 일정 내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는 업무만 처리하고는 거의 호텔 밖을 나가지 않는다. 호텔은 가장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지이다. 그 안의 식당, 시설들, 편안한 조경들, 산책로, 사우나나 마사지 같은 이완의 취미가 가능하니 얼마나 좋은 곳인지.


미국 도착 첫날, 우리는 LA 한인타운으로 가서 설렁탕을 먹으며 느끼했던 기내식의 허기를 채우고 호텔로 가서 푹 쉰 다음, 방문하기로 한 파트너 회사로 다음날 오전 출근했다. 그 회사의 오너인 첸은 창업자인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이은 3세 승계자였는데, 너무나도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아시안 (홍콩계) 아메리칸이었다. 동양인치고는 180은 넘어 보이는 거구에 아직 30대 초반의 에너지가 그를 매우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그는 백만장자 부자가 아닌가 말이다. 영 앤 리치의 전형인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영화 속 모차르트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크고 즐거운 목소리톤으로 우리를 자기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소개해 주며 인사를 하게 했는데, 그중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었다. 바로 첸의 비서였는데, 60대 후반의 할머니 비서가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며 악수를 청했다. 이름은 마리였는데 아마 외관이나 이름으로 보아 히스패닉이신 것 같았다. 첸은 "My queen, Marie"라고 그녀를 치켜세우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마리는 첸의 할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하면서 채용한 비서였다가, 그의 사후 첸의 아버지 비서로 수십 년을 일하고, 그의 사후 이제 또 그의 아들인 젊은 첸의 비서로 거의 3대를 걸쳐 일하고 있는 비서였다.


마리 할머니는 늙었지만 고왔다.
할머니비서.jpg


마치 고급 가구가 비싼 왁스로 잘 다듬어지면 우아한 앤틱이 되는 것처럼, 세월에 늙기는 했지만 교양과 유머로 매우 우아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여러 상사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일한 분이라는 게 매우 존경스러웠다. 특히 여자인 나는 더더욱 60이 넘도록 그렇게 왕성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마리 할머니가 너무 멋지게 느껴졌다.


첸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그것은 자랑이었다.

"마리는 우리 회사의 역사이자, 우리 가족의 역사예요.
미스 유니버스 열 명을 준대도 우리 마리와 바꿀 수 없답니다.
마리는 우리 회사의 보물이자 나의 제일 친밀한 파트너이니까요"


마리 할머니는 백발의 단발머리에 고운 화장을 하셨는데, 특히 빨간 립스틱을 바르셨던 게 무척 기억에 남는다. 첸의 말에 따르면, 마리가 전화를 받으면 어느 고객이든 다 기분이 좋아진 채로 자기와 통화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고 했다. 그 비결은, 계절감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멋진 인사로 통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면 ;


- 여보세요? 저 000 회사의 아무개입니다. Mr.Chen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날씨가 요즘 매우 춥습니다. 즐거운 성탄, 행복한 신년 맞으시기 바랍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저희 보스 Mr. Chen을 귀하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한여름 휴가철이라면 ;


- 여보세요? 저는 000 사의 아무개입니다. Mr.Chen 씨 계실까요? 통화하고 싶습니다.

- 아, 안녕하세요,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표님은 지금 해외 출장 중이셔서 통화가 어렵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남기고 싶으신 내용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네, 양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휴가는 언제 가시나요? 이렇게 멋진 여름에 여행을 가는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죠. 다음에 연락드릴 때 즐거운 여행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Mr.Chen이 돌아오시면, 저희 고객사 중에 제일 핸썸한 분이 연락을 주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웃음)

하하하하하

이런 식의 응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첸의 회사에 연락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리의 이런 즐거운 응대를 좋아한다고 했다. 얼마나 인사가 긴 지, 크리스마스나 신년, 추수감사절 같은 큰 휴가가 있는 시즌에는 인사를 아주 긴 대화처럼 한 후에 자기를 바꿔 준다며, 마리의 인사가 본인의 통화보다 더 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첸의 얼굴에서 마리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고, 한 회사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근무하는 그녀의 실력과 강단, 끈기와 성실함이 멋졌다.

그 미국 출장에서 나는 매우 인상적인 또 하나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아침 출근길의 미국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장이든 캐주얼한 옷이든 상관없이,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너무 씩씩하게 회사로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는 커피 하나와 길에서 파는 가벼운 빵 하나를 봉지에 들고는 바쁘게 운동화를 신고 자기 직장으로 향했다. 한국의 아침 전철역 출근길에 들었던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매우 대비되는 에너지였다.


실용주의, 나는 문득 그 단어가 생각났다.
남의 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 자신이 원하고 편한 대로 집중해서 사는 삶.


그 출장에서 그렇게 두 가지 인상적인 장면을 추억으로 안고 돌아왔다.

1. 미스 유니버스도 꺾어버리는 할머니 비서의 위풍당당함.

2. 정장에도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보무도 당당하게 출근하더 아메리칸 여성들.

나도 저렇게 내 일을 씩씩하게 오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대에 걸쳐 이어진 신뢰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자기 일과 자리를 지켜낸 것은 본인의 끈기와 실력이 밑바탕이었을 것이다. 잘하지는 못해도 오래 하고는 있습니다. 문득 이런 고백이 나온다. 오래 하는 것, 그것도 실력이다. 잘하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첸이 한국에 한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회사의 협업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기자회견을 한번 했었는데, 첸이 발표자로 나섰고, 서포터로서 함께 내가 보도자료들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회견이 끝나고 여러 여자 기자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첸이 또 언제 오는지, 첸과 저녁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 줄 수 없는지 (웃음), 혹은 소개 한번 해달라는 대략 그런 류의 부탁이었다.


첸은, 너무 잘 생겼었던 것이다 (웃음)

아무렴, 미스 유니버스도 울고 갈 어마어마한 비서를 대동하고 사는 대표인데 그 매력이 오죽했겠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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