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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도비만 딸, 상사의 멋진 로드맵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는 소위 일중독으로 불리는 부류였다. 70년대 한국 경제개발 부흥을 이끌었던 혹독한 선배들 밑에서 일을 배워, 그 역시도 엄청난 일중독의 인생을 사는 중이었다. 일 안 하면 죽는 줄 아는 세계관, 더 나아가 일 밖에 없는 인생관, 모든 것보다 일이 우선인 강박증, 대략 그런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고도비만 따님이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엄청 뚱뚱하다고 가끔 걱정을 하셨지만, 우리는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 들었었다. 어느 날, 따님이 자기 친구를 데리고 아빠 회사에 점심을 사달라고 왔다. 아빠는 회사 근처 뷔페식 샐러드바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고 먼저 회사를 들어오셨는데, 퇴근 시간 즈음 댁에서 전화가 왔다.


점심때 아빠 만나러 간다던 아이가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아내가 전화를 한 것이다. 부모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아이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하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내야겠다고 하던 그날 밤, 거의 10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가 돌아왔다.


얼마를 걸었는지 신발도 꼬질꼬질하고 아주 피곤한 기색으로 말이다.
뭘 하다 이제 왔냐고 꾸짖으니, 아이의 대답이 너무나 황당했다.


고도비만1.jpg

" 아빠가 회사로 들어가고 나서, 친구랑 그 뷔페식당에 남아서 음식을 먹었는데, 내가 너무나 과식을 해서 도저히 일어날 수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어. 그래서 친구랑 아빠 회사에서 집까지 거의 5시간을 걸어왔어요."


그 당시 회사는 명동이었고, 집은 길음동이었으니, 뒤뚱뒤뚱 걸음으로 근 5시간이 넘게 걸었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가 될 때까지 식욕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아이의 말에 그분은 너무 충격을 받아, 그날부터 아이의 비만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일단, 집에서 자율적으로 하는 식이요법은 아이가 도저히 조절을 못하고, 아이의 엄청난 식욕에 엄마도 감당이 안되니 불가능했다. 아빠는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수영반에 아이를 등록시켰다. 하지만, 수영을 하고 난 후에 더 강한 식욕이 몰려오는 부작용으로 운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식욕이 폭발할 때 만류하면 매우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했기 때문에, 부모는 강력하게 밀어 부칠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를 당시 유행하던 단식원에 방학 동안 입소시키기로 했다. 그날, 그분은 출근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를 단식원에 보내고 온 아빠가 무슨 면목으로 점심을 먹을 것이며, 나중에 살이 빠진다고 해도 죄책감에 아이 얼굴을 어찌 보나 걱정이 되었단다. 아이는 한 일주일을 그곳에 있다가, 결국 아빠가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약간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고도비만으로 살아갈 아이의 장래를 상상했다고 했고, 그 결론은 최대한 남과의 사회생활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게 디자인이었다.




그는 당장 딸에게 미술학원에 등록하라고 했다. 그림에 취미가 있는지 물었을 때, 딸은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로 딸은 미대 입시생이 되었고, 인서울의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이는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맘에 들어하며 잘 지냈지만, 어느 날 딸이 친구들과 미팅을 나간다는 말에 아빠는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비만인 딸아이가 그런 자리에 친구들과 가봤자, 외모로 비교되고 비하되거나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걱정하신 것이다. 철없이 대학생활을 즐거워만 하는 딸을 불러놓고 그는 말했다.


대학 중퇴하고 이탈리아로 유학 가라.


"아빠가 상사맨으로 전 세계를 출장 다녀봤을 때, 여자로서 정말 멋진 직업 중의 하나가 유럽의 디자이너들이었어. 그들은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 경력을 쌓아 나중에 자기만의 작은 스튜디오를 차리고, 패션 및 디자인 관련 산업에 종사하면서 일하지. 그렇게 유학 다녀와서, 한국에 작은 스튜디오 하나 차려서 너도 디자이너로 사는 게 좋아. "


당시는 IMF 직후라서 아직도 환율이 만만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손수 유학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관련 자료들을 다 찾아보며 조사한 뒤, 그 딸을 이탈리아로 유학 보냈다.


나중에 소식을 들었다.

따님이 돌아와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어, 패션쇼 부대산업 관련 일을 하는 디자이너로 잘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아빠의 계획대로 그녀는 최대한 혼자 작업하는 크레이이티브한 직업으로 무사히 착륙한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걱정과는 달리 착한 배우자를 만나 함께 스튜디오를 꾸리며 산다는 것,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는 것, 여전히 고도비만이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현명한 멘토로서 삶의 가이드 역할을 해 준 것은 그녀로서는 매우 lucky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안내해 준 그 길이 딸의 적성에도 크게 무리 없이 맞았고, 또 그것을 수용해 준 것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딸이 기획한 패션쇼에 가서 흐뭇한 모습으로 응원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Bravo, 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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