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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그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녀요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유난히 총애해 주셨던 상사가 있었다.

여러모로 코드도 잘 맞았고, 함께 일하는 동안 개인적인 일상들도 많이 나누며 공유했던 좋은 상사셨다.

특히 그는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당시 우리 팀에 좋은 도서도 가끔씩 선물해 주셨고, 좋은 식당으로 함께 회식을 다녔다. 남자분 치고는 꽤 깍쟁이 같은 스타일이셔서 후배직원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분이었으나, 대체적으로 업무스타일도 깔끔하셨고 IT 제품 얼리어답터여서 그런 부분에 많은 어드바이스를 받았다.


그렇게 10년 이상 근무하시다 독립해 작은 아웃소싱 회사를 차리셨다. 당시에 관행은, 그런 경우 사업 초반기에는 친정 같은 전 근무처에서 일부 일감을 받아 생존을 이어가는 일이 매우 흔했다.

그 역시도 첫 프로젝트로 우리 회사 업무의 일부를 아웃소싱 형태로 수주해 갔다. 어제는 고용주와 직원이었던 관계에서, 발주사와 외주처라는 갑을관계로 변경되었다.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이내 여러 프로젝트들을 따냈고 승승장구까지는 아니었지만 초반기 치고는 꽤 안정된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영업스타일은 여자 같은 부드러움, 깐깐한 원가계산이 그 특유의 현란한 오피스 문서 스킬로 표현되는 매우 꼼꼼한 방식이었다. 영업의 수단으로써 흔한 술자리 접대나 리베이트 이런 것에 크게 기대지 않았다.

30.88.jpg 출처 : 핀터레스트


우리 회사는 그에게 첫 프로젝트를 연간으로 계약해 줬고, 이후 3번의 갱신을 통해 그의 실적을 유지시켜 줬다. 그만하면 '친정'으로서의 의리는 다 한 셈이라고 봐야 했을 것이다.

그즈음, 회사 회계팀의 팀장이 바뀌었고, 새로 오신 분은 원가회계로 석사논문을 썼다고 했다.

새로운 팀장님은 오자마자 제일 먼저, 회사의 전체 계약서를 검토해서, 가격 경쟁력이 없는 건들은 타 업체와의 신규 견적과 조견 하여 제일 경쟁력 있는 업체에 주겠다고 하셨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이 아마 그의 회사와의 외주용역 아웃소싱 계약서였나 보다.

그는 타 회사의 견적을 받아본 결과, 그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4년 차부터는 갱신을 하지 않고 타 업체로 변경하겠다고 대표님께 제안했다.


대표님은 약간 입장이 곤란하신 거 같았다. 그래도 10년 이상 성실히 근무했던 직원의 독립 초반에, 이미 3년을 해 주긴 했지만 야박하게 이제는 빼겠다 하기가 불편하셨던 것.

새 팀장에서 일임하겠다고 하시고 빠지셨고, 새 팀장님은 그에게 메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그즈음 그는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새 팀장에게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고 잘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건 저희 권한밖의 일일뿐더러, 새 팀장님은 저희 상사인데 제가 상사가 대표님과 결론 낸 일을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회신을 보냈다. 이후, 그에게서는 더 이상의 메일이 오지 않았고 그렇게 잘 이해하신 걸로 알고 있었다. 그 이후, 개인적인 연락도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계약해지를 당했고, 회사는 최종적으로 타 회사와 새 계약서를 썼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부터 이상한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심하게 험담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냥 가벼운 험담 정도가 아니었어요. 정말 이년 저년 하는 심한 험담이었어요. 조심하세요"


"그분 조심하세요, 저번에 만났는데 OO님 험담을 엄청 하고 다니더라고요, 심하게요"


"지깐게 뭐라고 내가 한 부탁을 씹어, 나쁜 년 같으니라고... 거의 이런 말이었어요.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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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핀터레스트

내가 본인이 이메일로 부탁한 대로 새로 온 팀장에게 요청해주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의 두 가지 얼굴이 어이가 없었고, 함께 잘 지낸 시간들이 다 허망했지만 나는 특별히 그에게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나의 권한 밖의 일이었고, 이제 그는 나의 상사가 아닌데 그의 오더를 그가 떠난 직장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일로 토라져서 대표님과도 연락을 다 끊어 버렸다고 했다.

우리 팀 직원들 누구에게도 이젠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의 얼굴은 다양하다. 우리는 마음이나 인성을 숨기고 사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직장이란 어떤 곳인가? 조금만 까딱하면 내 자존심에 상처가 나기도 하고,

남의 진심을 이용하기도 하며, 남의 성공에는 질투가 자욱하게 깔리는 공간 아니던가?

31.3.jpg 출처 : 핀터레스트


그날 이후, 나는 '지나치게 친한 동료', '지나치게 총애해 주시는 상사' 등 일정 거리를 무리하게 좁혀 친밀하게 다가오는 인간관계를 경계하며 살게 되었다.


적정한 거리 = 진리라는 직장의 룰을 다시 한번 확인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회사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그 순간부터 모두가 생판 남이며, 업무라는 중대 과제에는 개인적 친밀감이 큰 베이스는 아니라는, 오히려 그건 때로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건이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상사, 그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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