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은 뉴스에나 나오는 일 아냐? 설마, 우리 회사에?
2018년 즈음,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미투(Me too) 운동이 있었다.
유명 연예인과 관계자들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던 사건.
그 폭로들의 내용을 보면 다 다른 것 같지만 그 양상은 또 한 가지 맥락으로 비슷했다.
작든 크든 권력이나 힘을 가진 자가, 자기 영역 내의 약한 상대에게 가하는 성적 괴롭힘.
아마 미투운동은, 2007년 신정아 씨 학력위조 이슈 이후, 가장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또, 거짓말 학벌로 많은 이미지 혜택을 누린 이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그대로 공개되었다.
Harrassment! 남을 괴롭히는 행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Racial이 붙으면 인종적 차별 괴롭힘, Sexual이 붙으면 성추행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의 사회생활이 증가하면서 이 문제는 지금은 많이 오픈되어, 그게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이 많이 심어졌지만, 어느 한 면에서 보면 또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40대 중반쯤 내가 과장일 때의 일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경기도 외곽에 별도의 물류센터를 갖고 있었다
본사에야 여직원들이 많았지만, 그곳에는 여직원이라고는 입출고 전산을 담당하는 한 명만 근무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남자 직원들이었다. 현장 재고관리 직원들 및 본사에서 내려간 관리자 남자 상사 한 사람.
맞다. 피해자는 그 유일한 여직원, 가해자는 그 유일한 남자 관리자. 여직원은 이제 30대 중반쯤의 미혼이었고, 그 남자 상사는 40대 중반의 기혼자였다.
근무지도 다르고, 크게 업무와 관련도 없어서 나는 그 여직원과는 거의 모르고 지냈다.
다만, 회계 감사나 재고 실사 등의 업무로 본사 회계팀에서 자주 물류센터에 나갔었고, 그렇게 회계팀 직원들과 물류센터 직원들은 잘 알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직원으로부터 내게 한 장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이메일이 온 것도 처음이지만, 그 내용이 매우 놀라웠다. 성추행 고발의 내용과 함께, 이 일에 대해 여직원 중 제일 나이 많은 내가 회사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 그 상사의 괴롭힘은 약 1년여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 그는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갈 때마다, 제 가슴을 만지고 희롱합니다.
* 그는 점심시간 탕비실 같은 곳에서 제 손을 잡고 깍지를 끼며 안기도 합니다.
* 그는 업무 지시를 할 때, 뒤에 와서 저를 감싼 채 귓불에 입술을 스치며 속삭입니다.
놀라운 내용이었고, 그 가해자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어서 더욱 놀라웠다.
작은 회사였지만 상장회사라서, 당시에 사내 성희롱에 대한 고발 채널이 형식적으로나마 사규에 안내되어 있었고 (인사담당자에게 익명 메일 발송 시스템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시스템으로 고발을 정식으로 하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내가 같이 이 일을 고발해 주기를 원했다. 두렵다고 했다.
하지만, 단지 여직원 중 제일 연장자라는 이유로, 그런 민감한 일에 함께 총대를 매기는 나도 두려운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했다.
나는 나서지 않았다. 그런 일일수록 온전히 당사자 혼자 명확히 보고해야 한다고 가벼운 조언을 해줬을 뿐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내가 경험한 것 중에 하나는, '실제 나서서 이야기 한 사람'에게만 사람들의 눈은 고정된다는 것이다. 실제 그런 결정은 회사가 한 것인데도, 정리해고를 언급하고 처리한 인사담당자만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원망의 대상이 되는 일들 같은 거.
나도 그녀만큼 두려웠고, 가해자의 성정을 알기에 더 나서기 싫었다. 그는 폭력적이진 않았지만 매우 비굴한 성격이었고, 업무 성과도 좋지 않아 좌천 같은 발령으로 물류센터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를 자극하기가 꺼려졌다.
밤길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란 말인가?
막말로 그 여직원이 내 친동생도 아닌데.... 나도 급기야 이렇게 소심해졌다.
우리는 둘 다 두려움에 휩싸였다.
결국, 그 여직원은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회사에 고발 이메일을 보냈고, 인사팀에서는 물류센터로 바로 내려가 해당 남자직원을 조사하고 내용을 녹음해 왔다. 그를 토대로 본사에서 임원회의를 열어 그에 대한 처리를 협의했다. 그는 의의로 순순히 본인의 행동을 다 인정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처리가 내려지기 전에, 그는 사표를 내고 회사를 조용히 떠났다. 그 일련의 절차들은 매우 쉬쉬하며 조용히 처리되었으며, 해당 여직원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는데, 얼마 안 있어 그녀도 퇴사를 결정했다.
누군가가 나를 어떤 편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지 가늠이 되기도 한다.
'성추행 당한 여직원'이라는 딱지.
가해자가 떠난 자리에, 피해자는 그렇게 딱지를 달고 혼자 많이 헤매다 퇴사했다.
그렇게 뉴스에나 나오는 줄 알았던 성추행 사건을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목도했다.
세상의 모든 괴롭힘이 다 악랄하고 나쁘지만, 나는 직장에서 그 악을 벌이는 이들이 가장 악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은, 괴롭다고 당장 안 나올 수도 없는 피해자 가해자 모두의 생계의 터전이며, 인생의 가장 황금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장 소중한 남의 그 터를 짓밟는 짓이다.
예전에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셨다.
세상 죄 중에 제일 큰 죄가, 남의 밥그릇 뺏고 걷어차는 죄란다...
그 발길질을 그 해 회사에서 나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