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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여직원 선물 서열전쟁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럼 이 선물은 버리겠습니다 !


회사 특성상, 상사들의 해외출장이 매우 빈번했다. 지금이야 클릭 몇 번 만으로도 해외 수입제품들을 바로바로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전히 해외출장을 갔다 오는 경우, 상사들은 직원들의 선물들을 사 오곤 하셨는데, 대부분은 해외 기념품이었지만, 여직원들의 선물을 특별히 다 따로 사 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직원들의 선물

기념품이 압도적이었는데, 특히 키링 열쇠고리가 많았다. 미국은 초콜릿, 유럽은 볼펜, 이집트는 파피루스, 일본은 과자, 중국은 부채, 남미는 마리아치 모자 인형, 러시아는 캐비어, 동남아시아는 식탁보나 젓가락세트... 지금도 여행 기념품으로 꽤 많이 소비되는 품목들이다.


여직원들 선물

화장품이 압도적이었다. 면세점에서 색조 화장품 세트를 주고 사다 주셨는데, 대략 기초 풀세트, 아이쉐도우 세트, 립스틱 세트 이런 식으로 사다 주시면, 여직원 중에 제일 왕언니가 받아서 부서별로 순서대로 나눠갖는 구조였다.

28.1.jpg 출처 : 핀터레스트


그 당시 내가 약간 싫어하던 여자 후배가 있었다. 나와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업무로 가끔 엮이는 일은 있었는데, 늘 자기 업무를 우리 팀에 전가하는 스타일이어서 나는 그녀와 업무가 맞닿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팀 직속 상사분과 코드가 잘 맞았고, 다른 팀인 그녀를 우리 팀 회식에 가끔 부르기도 하며 친하게 지내셨다. 회식이야 뭐 업무가 아니니 우리 팀 직원들은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 상사는 다른 분들보다, 출장 다녀오시면 늘 선물을 제일 많이 사 오셨었다.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걸 즐거워하셨고, 작은 기념품이라도 해외에서 온 이국적인 재미가 있으니 직원들도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상사가 미국 출장을 길게 다녀오시면서 여직원 선물을 잔뜩 사 오셨다.

결재를 받으러 들어갔더니, 내 것은 따로 쇼핑백에 넣어서 주셨는데 샤넬 아이쉐도우 팔레트였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따로 불러서 주셔서 기분이 좋았고, 내가 쓰는 칼라는 아니었지만 다른 칼라와 섞어서 쓰면 되겠다 고 생각하며 임원실을 나왔다.

28.3.jpg 출처 : 핀터레스트

그날 오후, 점심 식사 후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더니 그녀도 양치를 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제품을 들고 있었다 (웃음)

그녀는 특유의 약간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은 분께 받은 거 같네요...."

"아. 그러네." 나는 이렇게 말하고, 그 셰도우를 철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쨍 소리를 내며 깨졌다.

"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선배니~이~임? " 그녀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 원래 칼라 안 맞아서 버리려고 했어" 하고는 화장실을 나와 버렸다.

28.5.jpg 출처 : 핀터레스트
30대 후반의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자존심도 셌고 성격도 예민했다.

내가 싫어하는 후배와 동급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고 불쾌했다.

성질대로 해 버려 속은 시원했지만, 슬금슬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사가 준 선물인데,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 박살을 냈으니, 그 상사와 친밀한 그녀가 고자질이라도 하면 큰 낭패가 될 게 분명했다. 하여간 그렇게 약간 서먹한 상태로 각자의 일을 하며 지냈고, 그 일은 일단 둘 만의 해프닝으로 일단락된 거 같았다. 다행히 상사에게서는 그 어떠한 특별한 내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시는구나, 그래, 설마 그녀가 그걸 고자질했을 거 같진 않아'라고 약간 안도했다.




그리고 그해 연말쯤 그 상사는 다시 미국 출장을 가셨고, 변함없이 직원들 선물을 사 오셨다.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이번에도 작은 쇼핑백을 하나 주셨다 (웃음). 하지만, 지난번에 그녀와 같은 선물을 받아 본 나는, 더 이상 그 쇼핑백 안의 선물이 뭔지 크게 궁금하지 않아서,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나오려는데,

내 등에 대고 상사가 말했다.

"지난번 화장품 다 박살 냈대매? 하하하하.... 내가 지난번에 큰 실수 했다. 근 7년이나 내 Assistant로 제일 많은 일들을 서포트한 00 과장 선물을 다른 어린 후배 여직원 선물과 똑같이 줬으니. 생각해 보니 내가 큰 실수 했더라고. 미안했어. 이번엔 신경 써서 샀는데 한번 보시고, 마음 풀어요"

등에 땀이 팍 났다.

'아, 그 계집애가 다 고자질을 했구나'... 아!.....

자리에 와서 살짝 쇼핑백을 열어보니, 명품 지갑이 들어있었다.

28.4.jpg 출처 : 핀터레스트

해외직구가 일상이 된 요즘 세상엔 그런 문화가 거의 없어졌고, 그 일은 지금도 웃음 나는 추억이 되었다.

돌아보면, 다 힘이 넘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일에 자존심을 세우고, 열렬히 질투를 하고, 선물을 집어던지고, 그걸 누가 고자질했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30대의 나.


지금은 중요한 일 몇 가지를 빼면 그냥 나머지는 대부분 귀찮다 (웃음)

그깐 남이 선물해 준 화장품 립스틱 색이 분홍이면 어떻고, 레드면 어떻냔 말이다. 어차피 남이 사 준 화장품들은 대부분 색이 안 맞아 잘 쓰기도 어렵고, 덕분에 그 시절 우리 엄마의 화장품엔 내가 준 면세품 립스틱들이 그득했을 뿐인 것을.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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