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규직 거부, 그녀의 욜로선언
25. 정규직 거부합니다. 그녀의 "욜로"선언.
그녀는 IT 개발자였다. 우리 회사는 당시 유행하던 ERP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 프로그램의 외주사 직원들이 회사에 상주하면서 한 6개월간 해당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해당 팀의 팀장 및 그 밑에 여러 급의 개발자들이 한 4명 정도 와서 한 팀으로 일했는데, 그녀는 그 4명 중 제일 막내 개발자였다. 막내라고 해도 이미 서른 후반,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PL급은 되는 경력의 개발자였다.
그녀는 왜소하고 보이시한 얼굴에 부끄러움도 많고 말수도 적은 스타일이었지만, 가끔 탕비실에서 만나면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좋은 사교성이 있었다. 왠지 신뢰가 가는 외모였다.
그런 프로젝트를 하면, 팀별로 다 각자 업무의 플로우며, 되었으면 하는 투비(to be model)및 업무 효율방안 등 여러 자료들을 제출하게 되고, 관련 회의도 많이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당시 너무 스트레스가 많은 업무를 맡고 있었고, 회사생활이 너무 지겨운 상태였다.
어느 날 그녀와 탕비실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 정말 지겨워 죽겠어요, 진짜! 하고 한숨을 쉬었더니, 그녀가 잠시 갸우뚱하더니,
- 그럼 바로 그만두세요! 지겨워 죽겠는데 어떻게 회사를 다녀요...." 그러는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 지겹다고 회사를 그만둬요? 헐...." 그랬더니
-저는 그래서 정규직 일부러 안 해요. 프로젝트별로 계약직으로만 일하고, 끝나면 바로바로 여행 가거나 제가 하고 싶은 거 해요, 그래서 모아 놓은 돈은 하나도 없지만, 쌓아둔 스트레스도 없어요. 이러는 거였다.
출처 : 핀터레스트 그녀는 지금까지 여행해 본 나라들을 열거했고, 하고 있는 취미들, 그중에는 이미 전문가의 경지에 이른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 장비에 대해 얘기해 줬다. 십 년쯤 타서 전문가의 경지에 오른 자전거, 안나푸르나까지 동호회 친구들과 다녀온 트레킹, 이제 재미를 붙인 스킨 스쿠버와 스키, 인라인 스케이트까지.
그래서, 직장생활이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작은 원룸에 살면서, 저축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해외여행의 경비들도 만만치 않았겠지만, 그녀는 쇼핑에도 크게 망설이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며,
취미생활에도 많은 돈을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걱정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은 전혀 미래에 대해 큰 걱정이나 불안을 갖고 살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고, 매일이 행복하면 행복한 인생이 되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며.
욜로라는 인생관을 그 당시에 언론이나 블로그 등에서 들어만 봤지, 그렇게 실제로 욜로족을 내 눈으로 본 건 거의 처음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6개월의 프로젝트가 끝나 ERP가 완성되고, 그녀는 우리 눈에서 사라졌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서 1촌 관계였던 그녀와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고 근황도 보고 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이제 내 기억에서 사라져 갔고, 너무 지겨웠던 나의 회사 권태기도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 다시 평온한 월급쟁이의 마인드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일 년쯤 후에, 그녀에게서 이메일로 청첩장이 왔다.
아일랜드인가를 여행하다 만난 비슷한 마인드의 친구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국제결혼은 아니었음)
같은 인생관을 가진 이와 만나, 좋은 인생을 이루겠다는 그런 이메일에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이면서도 담담한 각오가 담겨 있어서 보기 좋았다.
아주 한참 후, 내가 들어가 본 싸이월드에는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는 행복한 모습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요즘 액티브 시니어란 말이 유행이다. 그 액티브란 말이 그녀와 잘 매치된다.
지금쯤 50대가 되었을 그녀, 액티브 시니어가 되어 있기를 상상해 본다.
결혼이라는 긴 여정의 "정규직'은 잘 해내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