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케빈은 대기업 물류회사의 직원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전체 해외오더의 물류를 거의 그 회사 한 곳으로 몰빵 해 주고 매우 경제적인 요율과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었다. 그래서, 각 파트별 담당자들은 물론, 대표님 두 분간의 관계도 매우 돈독했다.
명절에는 서로에게 제일 좋은 선물이 오고 갔고, 연말에는 다 같이 회식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 팀을 담당하던 그는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 2세였으며 한국어가 매우 유창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회사의 미국법인에서 현지채용된 직원으로, 당시 그 사무실에는 미국인과 한국인 교포, 일본인과 캐나다, 히스패닉도 한분 계셨던 걸로 기억된다. 전 세계에서 미국 항구로 도착한 수많은 컨테이너들을 관리, 통관, 운송하는 그런 업무를 처리해 줬다.
매일매일 수많은 이메일과 팩스를 주고받고, 시차가 있긴 했지만 급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집에 가서 늦은 밤 미국으로 전화를 하곤 했다.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은 글에서도 많이 알 수 있고, 또 통화하면서 목소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전송받곤 한다.
그는 매우 예의가 바르고 늘 호의에 찬 태도로 우리 업무를 처리해 줬고, 특유의 따뜻하고 친절한 목소리 때문에 우리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특히나 그의 목소리는 매우 저음이라, 우리는 키가 크고 거구인 모습을 상상했었다. 여직원들은 특히나 그와 통화하는 일들을 즐거워했고, 얼굴을 궁금해했다. 나 역시도.
그러던 어느 해, 우리 회사의 미주 오더 매출이 최고치를 찍어 해당 팀 직원들에 대한 포상휴가가 주어졌는데, 우리만 가는 것이 아닌, 우리와 그 회사의 미주 담당팀 전원이 가는 여행이었다. 경비는 다 각 회사의 대표님께서 지불하셨고, 그렇게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조인트 패키지여행을 가게 되었다. 우리 회사가 최고 매출을 찍었으니, 그 미주 오더들의 물류를 담당한 그 회사의 미주팀 실적도 엄청나게 좋았던 것이다.
근 3년간을 메일과 통화만 직원들과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SNS나 블로그,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라) 드디어 얼굴을 보고 같이 며칠간 해외여행을 하게 된 것이 설레었다. 그 직원들로서야 뭐 미국에서 국내여행 패키지니, 우리로 치면 경주여행 가는 거 정도 되었겠지만, 함께 만난다는 즐거움은 서로 가득했다.
공항에 도착해 호텔에 도착했고, 우리는 그 팀도 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로비에 내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에 한 무리의 팀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끼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얘기하는 걸 듣더니 그중 아주 작은 어떤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혹시 OOO 씨?
네... 맞아요. OOO 씨인가요?
거구의 저음을 가진 사나이일 거라는 우리의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160이 겨우 될 것 같은 작은 키에 너무나도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체중은 50kg 조금 넘을 것 같았다. 웬만한 작은 여자들만 한 너무 왜소한 남자였던 것이다 (웃음). 우리의 전화기 속 상상의 케빈은 100% 반전으로 현실에 등장했다.
너무 말라서 바람 불면 훅 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날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다음날 호텔로 온 패키지 버스에 모두 올라 라스베이거스로 여행을 갔다. 버스 안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진행하는 너무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게임도 하고, 미국의 전반적인 역사도 간략하게 들었다. 짝을 지어 퀴즈 문제 대회를 했는데, 미국 지리에 관한 상식 퀴즈였다. 그와 짝이 된 나는 척척 문제를 맞히는 모습에 신나게 박수를 쳐주며 응원했고 우리는 200불 상금을 받았다. (웃음)
그 상금은 그 회사의 대표님께서 재미로 퀴즈대회에 찬조하신 금일봉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우리는 하루에 6~7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는 강행군의 패키지여행을 했고, 미국이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 그 피곤으로 실감했다. 라스 베가스에 가서 300불쯤 슬롯머신 도박도 해보고, 쇼핑몰에 가서 당시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들던 캐주얼 브랜드 GAP 매장에 가서 세일하던 옷들을 신나게 쇼핑하고, 오는 길에는 카페이 들러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커피를 하나씩 들고 수다를 떨었다.
마지막 날에 후버댐도 돌아보고, 네바다 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들으며 즐거운 패키지여행을 마무리했다.
언제나 업무관련하여 우리가 급하게 부탁하는 문제들을 친절하게 해결해 주던 그는, 우리 상상처럼 아라비안 나이트의 거구 지니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따뜻하고 매력 있고 똑똑한 젊은이였다.
마지막 날, 그와 저녁을 먹으며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 이민 와서 겪은 아픔들을 얘기해 줬다.
덩치가 작아서 백인 친구들은 나를 끼워주지 않았어요. 덕분에 늘 책만 끼고 살아 공부를 잘했죠.
지금 석사 논문을 쓰는 중인데, 2~3년쯤 돈을 벌어서 다시 공부하려고 취업해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가을쯤에 사표를 쓰고, 다시 논문을 마무리해야 될 거 같아요.
미국 와서 상처도 많이 받고 어릴 때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어디 가든 누가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이젠 미국이 집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어릴 땐 늘 한국에 다시 가야지 그랬거든요.
이제는 미국이 저의 집입니다.
지금쯤은 50대의 중년이 돼있을 케빈, 그가 그 때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지금쯤 참 좋은 인생을 살고 있기를 빈다. 다시 회상해도 정말 기분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