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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The Imagine Breaker

by 오스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1984년 즈음에 이스라엘 국적의 '유리겔라'라는 사람이 한국을 다녀 간 적이 있었지. 당시 국영 방송에 생방송으로 출연해서 숟가락을 구부리고 고장 난 시계를 고치거나 유명 여배우가 생각했던 사과의 이미지를 그려 내는 등의 능력을 시연해서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었어. 방송 이후 학교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손으로 문지르던 아이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었지.


하지만 내게 그 모든 일들은 너무 시시한 것들이었어. 세상에...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이라니... "단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으로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생각이었을 거야. 아마도.

아버지가 사 주셨던 '오로라의 소녀'라는 문고판 이야기 책이나 일본 만화가가 그렸던 '바벨 2세'같은 만화책을 보면서 어쩌면 당시에 나는 내가 선택받은 인간으로 태어나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 말하자면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점심시간마다 학교 운동장에 큰 오징어 그림을 그려 놓고 두 편으로 나뉘어 공격과 수비를 하는 놀이를 즐기곤 했는데 그 놀이의 명칭은 '오징어 이상'이었던 것 같아. 오징어는 이해가 가는데 '이상'은 뭘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이해가 안 되는데 어쨌건 그날 나는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고 공격을 하는 아이들이 세 명 남는 동안 나를 제외한 수비팀 전원이 전멸한 상황이었지. 공격을 담당하던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면 꼼짝없이 게임에서 지는 수순이었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공격수 세 명이 한 번에 내게 달려드는 순간 나와 부딪힌 아이들 모두가 튕겨져 나가 금 밖으로 나 뒹구는 일이 벌어진 거야. 참 이상한 일이었지. 사실 나는 대단한 약골이었거든.


그 날 이후 가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긴 했어. 방과 후에 내 발밑으로 굴러온 농구공을 무심히 뒤로 돌아서 던졌더니 10미터 거리에 있던 농구 링으로 공이 빨려 들어갔던 일이나 학교 운동회 날이 싫어 비가 왔으면 하고 생각이라도 할라 치면 어김없이 당일날 아침에 비가 내리는 걸 여러 번 보았지.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뿐이라고? 그래. 나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지.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일 따위를 내가 성공하지는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또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단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 이미 내게 초능력이란 것은 크리스마스이브 날의 '산타클로스' 같은 일이 되어 버린 거야.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미국 영화를 참 좋아해서 나중 그 감독의 영화를 다 찾아서 보게 되었지. '브라이언 싱어'라는 감독인데 그 감독이 만든 '엑스맨'이라는 영화를 내가 서른 살 즈음에 보게 되었어. '마블 코믹스'라는 미국 문고판 만화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가진 자들 즉, '뮤턴트'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었지. 정말 재미있더군. 특히 그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던 인물은 '찰스 자비에' 교수였어. 뮤턴트 영재학교 교장이면서 텔레파시로 타인의 생각을 조정하는 능력자였지. 더 이상 무슨 능력이 필요하겠어? 하나님도 사용하시지 않는 능력인데.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 말이야.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미 만화나 영화가 현실의 판타지라는 사실 쯤은 알만큼 아는 나이였어. 주식투자로 아파트 전세금을 훌렁 날리고 실직을 하고 첫 아이가 태어 나는 등 정신없는 날들을 계속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지. 그렇게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나이가 어느새 마흔이 넘어 있는 거야. 오 마이 갓... 내게 시간을 점프하는 초능력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미국 민담 속의 '립 밴 윙클'처럼 말이지.


그러다가 마흔두 살 되던 해 여름 즈음에 동유럽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어. 가족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었는데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여기저기를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여행이었지. 여행 중간 체코 프라하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가 '체스키 크롭로프'라는 이름의 고적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야. 정말 멋진 곳이었지.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입간판도 보였고 마을을 휘감고 있던 강이나 마을 가운데 우뚝 솟은 성채의 모습들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지.


지도 한 장을 들고 시가지 여기저기를 걸어서 둘러보다가 우리는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시가지 외곽의 골목길로 잘못 들어서면서 길을 잃고 말았어. 크지 않은 마을이라 다행히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었는데 아이들이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되니까 살짝 긴장이 되더군. 그래서 골목길 모퉁이의 그 카페로 들어갔었지. 스테인드 글라스로 창을 장식한 그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보니 햇살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더군. 주문을 하고 지도를 펼쳐 길을 물으려 하자 40대 후반쯤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와 자기소개를 했어. 지금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카페의 주인이라고... 그러면서 지도 위에 현재 위치를 동그라미로 표시해 주고는 시가지로 돌아가는 지름길을 표시해 주었지.


주문했던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나 집사람과 나누어 마셨던 그 커피는 맛이 아주 일품이었어. 긴장이 일시에 확 풀리는 느낌이었지. 게다가 그 여주인은 자신을 '집시 (보헤미안)'라고 소개 한 뒤 '타로' 점을 봐주겠다고 하더군.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집시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이 생겨 거듭 사양을 했었는데 돈 걱정 말라며 나와 집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어. 순간 스무 살가량의 젊은 아가씨 모습이 언뜻 그 얼굴에서 스쳐 보였는데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 그리고 그 여주인이 섞어 놓은 카드에서 두 장의 카드를 무심결에 뽑았지. 여주인은 두 카드의 점괘가 완벽히 일치한다고 했어. '해방(Release )'의 점괘라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웃고 말았는데 커피값을 지불하고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그 여주인은 내가 해방된 것을 축하한다고 하더군. 다행히 타로 카드에 대한 비용은 별도로 지불하지 않아 당시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지. 덕분에 쉽게 길을 찾았고 그 여름날의 가족여행에 대한 기억도 잔뜩 찍어 놓은 사진 파일들을 빼고는 가물해 졌어. 내 머릿속에서.


그 해 가을이 깊어지던 어느 날 여행가방에서 내 여권을 찾다가 우연히 그 지도를 발견하게 되었지. 체스키 크롭로프에서 길을 잃었을 때 표시를 했던 그 지도 말이야. 그때 생각이 떠 올라 씨익하고 웃었는데 표시가 되어 있던 그 지도 귀퉁이에 파란색 펜으로 쓴 'Imagine Breaker'라는 손글씨가 눈에 들어 오더군. 순간 호기심이 생겼어. 솔직히 말해서 당시 그 카페 여주인의 점괘가 무슨 말이었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거든. 지나친 친절에 대한 이방인의 막연한 경계 본능이었다고 할까? 나는 인터넷으로 Imagine Breaker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았지. 일본 무슨 만화 어쩌고 하는 내용이 쭉 뜨던데 그중에서 어떤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어.


'Imagine Breaker- 다른 사람의 초능력이나 사물의 벌어지는 어떤 현상을 중화시키는 능력'


제임스 랜디라는 캐나다 출신의 마술사가 있었어. 나름 돈도 벌었고 미국 초현상 연구회 회원으로 교육재단을 설립한 후 '초능력의 진실(The Faith Healers)'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었지. 우리에게는 초능력을 시연해 보이면 백만 불을 준다는 프로그램의 기획자로 유명한 사람이었어. 들리는 후일담으로 수 만여 명이 도전했지만 그 돈을 챙겨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더군. 세상에 그렇게 초능력자가 없는 걸까? 초능력이라는 개념의 실체는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한편으로 재미난 실험이었지만 그 당시에 난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어. 문득 생각난 그에게 편지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지도를 발견한 날 밤늦은 시간이었어.


구글링을 한 결과 그가 이사장으로 있다는 교육재단의 주소를 알아냈고 내 질문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어. 그러고 나서 잊을만하던 3주 뒤에 답신이 왔더군.



친애하는 OOO 씨

답변이 늦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선 한국에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매우 흥미가 생기는군요. 뭐든 처음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유도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스페인 지로나' 지역에서의 모임 관계로 약 2주간 자리를 비웠습니다.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합니다. 문의하신 'Imagine Breaker'라는 개념은 근래에 와서 정립된 초자연적인 현상의 개념입니다. 기존 자연계에서 일어 나는 현상들을 통제하는 힘의 근원과 연관성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그 일들을 제어하는 힘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지요. 이것은 천체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랙홀'과 '화이트 홀'의 역학적 관계 정도로 이해를 하시면 될 듯합니다. 완전히 같은 이론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직 이런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존재가 발견된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신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군요. 더 필요하신 질문이 있으면 추가 질문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방문했던 한국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죠.

제임스 랜디


그의 답변이 적힌 노트북 모니터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어. 여러 번 그의 답변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 하기는 어렵더군. 내 영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걸까? 전문 용어 몇 개를 제외하고 그다지 어려운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평이한 문장이었는데도 말이지. 머리가 지끈 거리는 걸 느꼈어.


밤이 깊어지고 있었지. 가벼운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동네 인근으로 산책을 나왔어.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오던 밤이었지. 가을 달이 밝아 가로등 불빛이 무색하게 느껴지던걸. 동네 어귀까지 어슬렁 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어. 뒤를 돌아보니 텅 빈 골목길이었지. 다시 가벼운 두통을 느껴 잠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


내가 지금까지 주절주절 떠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지. 거울을 맞대어 보듯 또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는 거야. 그 눈을 바라보는 순간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어. 나는 'Release' 되어 있었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조금 더 생각해 봐. 나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으니.


다만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시계를 고치는 일 따위로 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지.


Release :
<사람· 동물을>
구속 장소에서) 해방[해제, 석방]하다
자유롭게 하다(relieve), <사람의> 의무
· 부채 등을) 면제[해쇠하다, <사람의>
고통 등을) 없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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