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와서 거짓의 소멸을 보았다."
A.D 632년 6월 8일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지방의 오아시스 마을 '야스립'에서 한 노인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메카의 유력한 가문인 '꾸라이쉬'족 '하심'가의 아들로 태어나 오늘날 16억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남자.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쌀랄라후 알라이후 와 쌀람)'였다.
이슬람력 9월 '라마단'월을 맞아 알 마디나는 순례객들로 북적였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는 '앗나바위'모스크 주변은 밤 10시가 넘어서자 빽빽한 차량의 행렬이 인근의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차가 '하람 (무슬림 외 출입이 금지된)'지역을 벗어나자 다소 차량의 통행이 뜸해졌고 그제야 브레이크 페달에서 나는 겨우 발을 뗄 수가 있었다. 오른손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밤 11시가 막 가까운 시각이었다.
차가 '알끼블라타인'모스크 인근을 지나 신호 대기를 받았다. 그날따라 빨간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주파수를 찾느라 몇 차례 라디오의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는 사이에 창 밖에서 웬 노인 한 명이 다가와 차 문을 열고는 조수석에 털썩 앉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앗쌀라무 알레이쿰...젊은이. '우후드' 산 앞 까지만 태워 줄 수 없겠나?"
노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신호등의 색깔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뒤에서 빵. 빵 거리는 차들의 경적 소리가 요란했다. 일단 차를 직진하여 사거리의 모퉁이에 정차하고 그 노인의 행색을 상세히 살폈다. 정신이 이상한 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주름진 눈가에 깊은 눈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어르신... 늦은 시간이라 우후드 산 까지 가기에는 제가 시간 여유가 없는데 택시를 타시죠. 돈이 없으시면 제가 택시비는 드릴 테니."
내가 지갑에서 50 리얄 지폐 한 장을 꺼내면서 말하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랍어를 이해하는 한국인이라... 드문 일이군. 그것도 이 예언자의 도시에서 말이야. 자네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이지만 내 부탁을 한번 함세. 자네에게도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으니 잠시만 수고를 해 주면 무척 고맙겠어."
노인의 말은 침착했고 온화했다. 설득력이 있었고 부탁하는 자의 비굴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쉽사리 거절하기 힘든 망설임을 그로부터 느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30여분 정도면 왕복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선 후 고개를 끄덕여 차의 방향을 우후드 산 쪽으로 향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힐끗 노인의 옆모습을 보았지만 노인은 미동도 없이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조명을 환하게 받고 있는 우후드 산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었다. 마치 하얗게 눈이 내린 겨울산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낮에는 단지 척박한 돌 산으로 보이는 이 곳이 밤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일까?
메카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차가 빠져나와 우후드 산의 기슭에서 멈추었다.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네 나이 때 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네. 변성기가 채 시작되지도 않아 마치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 무척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었네. 그날도 오늘처럼 초승달이 걸려 있던 밤이었는데... 잠시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지?"
노인이 던진 뜻밖의 부탁에 내가 다시 한번 당황하자 노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자네는 참 착해 보이는군. 그 눈매가 난 마음에 들어. 남들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는 얼굴이야. 오늘 내가 자네와 만난 것이 단지 우연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노인이었나..
"두려워하지 말게. 단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로 족하다네. 어쩌면 자네 또한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아주 오래 전의 그 아이처럼 말이네."
노인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언뜻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 이름은 '바히라'라고 하네. 아무렴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어떻겠나 만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난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까시윤' 산에서 양을 키우며 살았어. 내가 살던 시대에 다마스쿠스는 정말 대단한 곳이었지.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면 자네 믿을 텐가? 비잔틴과 오리엔트에서 몰려 든 상인들이 저마다 황금의 꿈을 꾸며 그곳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었지. 그 아이도 아마 장사를 하는 삼촌을 의지하여 그곳에 처음 왔을 거야. 정말 맑아 보이던 아이였지. 처음 보는 순간 그 아이가 바로 내가 애타게 찾았던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겠더군. 오랜 세월 간절히 기다린 보람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네. 자비로우신 하나님."
노인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또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마스쿠스'라니. 내전으로 지금 초토화가 된 그 도시에서 누가 누구를 만났다는 이야기 일까?
"실성한 노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이 내 오른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주름진 손마디로 따스함이 내게 전해 졌다. 나와 노인의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주 아주 오래전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마스쿠스가 '움마이야드' 왕국의 도시가 되기도 전의 일이라네. 아무튼 난 그 아이에게 축복을 했지. 그리고 메카와 다마스쿠스를 왕래하며 장성해 가는 그 아이를 줄곧 지켜볼 수가 있었네. 무척 호기심이 강하고 신념이 강한 아이였지. 나를 아주 잘 따랐던..."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후 노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대추야자 두 알이었다. 노인은 그중 한 알을 내게 권했다. 망설임이 있었지만 곧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시한 후 입 안으로 가져가 그것을 씹어 보았다. 입 안 가득히 단 맛이 퍼졌다. 뭐랄까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맛의 세계였다. 내가 아는 대추야자의 맛이 아니었다. 내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이 활짝 웃었다.
"그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짓는군. 자네는. 그 아이의 결혼식 때 내가 선물했던 대추야자일세. 이것으로 나는 그 아이를 축복해 주었지. 나이 차이는 꽤 있었지만 그 아이에게 행복을 선사했던 엄마 같은 신부였어. '카디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 또한 한시름을 놓았다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루어졌던 거야. 인 샤알라."
어느새 시간이 밤 열 두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라마단을 맞은 알 마디나의 밤 풍경은 순례객들과 알 마디나 사람들의 왕래로 인해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로를 메운 차량의 행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노인이 손을 들어 차 유리창 밖 '앗나바위' 모스크를 가리켰다. 우뚝 쏫은 미나렛들이 녹색의 지붕을 사이에 두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이 바로 저곳이었네. 저녁 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자는 듯 누워 있더군. 물론 아주 나중의 일이었네만...."
노인의 얼굴에서 깊은 회한의 표정이 보였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그의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결혼을 하고 그 아이는 가난의 그림자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들 모두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았네. '알 함두릴라'...
나는 그 아이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네. 내가 다마스쿠스의 산에서 기도했던 방식이었지. 어두운 밤 시간 빛 한줄기 없는 동굴에서의 명상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다네. 모든 두려움이 흩어지는 걸 느끼지. 아침이 되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의 밑바닥에 비로소 고요한 평화가 찾아들지."
노인이 나를 보며 싱긋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이제 판단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을 알았다.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젯다'에서의 일을 보려면 이제 이즈음에서 양해를 구하고 노인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내 입에서 꺼내기가 무척 난감했다. 노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져 있었다.
"자네 나이 때 그 아이는 가브리엘을 만났어. '메카' 뒷 산의 좁은 굴 속이었지. 나중에 사람들은 그곳을 '히라'라고 했네. 그곳에서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어. 하나님의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진 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가브리엘과의 만남을 주위에 이야기하면서 그 아이는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네. 꾸라이시 일족에서 났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로 여겨져 생명의 위협을 받은 거야. 결국 이곳 야스립으로 도망을 와야 했네. 그때만 해도 이 곳은 조용한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에 불과했지. 계속되는 메카 사람들의 위협이 있었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여기 야스립을 차지한 그 아이는 우리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다 천막을 치고 '우후드' 전투를 준비했다네. 굉장한 시간이었지. 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돌아가던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던 일이 바로 엊그제 일로 여겨지네.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가 다가와 거짓됨이 소멸하는 마지막을 지켜보게 되었던 순간이었어. 알라후 아크바르."
나를 바라보며 조근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노인이 순례자의 복장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아이를 바로 이 곳 야스립에서 하나님께 보낸 이후 난 세상을 떠돌며 살았네. 참으로 기다리기 힘든 세월이었지. 하지만 이제 내 고단했던 여정의 마무리를 마침내 보아야 할 시간이 된 듯싶네. 이 두루마리를 자네가 좀 맡아 줄 수 있겠나? 평생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그 아이가 말년에 가서야 글을 깨우친 뒤 직접 자신이 전해받은 메시지의 처음을 기록한 것이라네. 하나님이 자네를 지켜 주신다면 이 글에 영원성을 부여하실 테지."
노인이 건네는 두루마리를 펼치자 이슬람의 성전인 꾸란의 '개경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الْحَمْدُ لِلَّهِ رَبِّ الْعَالَمِين
الرحمن الرحيم
مالك يوم الدين
إياك نعبد و إياك نستعين
اهدنا الصراط المستقيم
صراط الذين انعمت عليهم
غير المغضوب عليهيم و لا ضالين
여기까지 말을 마친 노인은 내 왼쪽 가슴 위로 자신의 오른 손바닥을 올린 뒤 나직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더니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우후드'산의 가파른 길을 올라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 비상등이 내는 깜빡이 소리가 적막하게 들려왔다. 노인이 내린 자리에 놓인 두루마리 하나가 그와의 만남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실감케 했다. 노인이 건넨 대추야자의 씨를 그제야 입 밖으로 뱉어 냈다. 하늘에는 라마단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손바닥에 뱉어 놓은 것은 대추야자의 씨앗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몬드 크기만 한 황금색의 '호박 (Amber)'이었다. 차의 앞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황금색으로 반짝이던 호박 속에는 '읽어라'라는 글씨가 아랍어로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