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것과 잃어야 하는 것의 그 경계를 생각함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50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되었어.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 보니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지. 다녔던 학교 이름은 여전히 기억이 나는데 그 학교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은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을 못 해. 여기저기 옮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이들과 제대로 된 정을 나누지 못해서였는지. 아무튼 처음 서울에 왔더니 아이들이 엄청 놀려 대더군. 아마 사투리 때문에 그랬겠지? 생각해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 난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거든. 지금도 내 말투 어딘가에 부산의 냄새가 풍긴다는 이야기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많이 듣는 편인데 뭔가 말에도 '본적' 같은 게 따라다니는가 봐.
가만히 생각해봐도 난 썩 공부를 잘했던 학생은 아니었어. 매 수업시간마다 그려 놓은 낙서들로 교과서 양 귀퉁이가 빽빽하게 채워지곤 했었지. 주로 당시 유행했었던 어린이 잡지 속의 '로봇 찌빠'라던가 아니면 '태권브이'나 '주먹대장'같은 캐릭터였을 거야.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어떤 얼굴들의 눈. 코. 입을 그려 댔지. 지방에서 올라 와 공부는 어중간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도 하지 못하는 나 같은 아이에게 같은 반 아이들도 처음 호기심을 보이더니 어느새 그 관심들도 시들해지더라. 물론 담임 선생님도 마찬 가지였고.
그러다가 5학년이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어. 새로 바뀐 담임 선생님이 여선생님이셨는데 부산 사람이었거든. 동생 일로 학교를 잠깐 방문하셨던 엄마와 한 번 만나신 이후로 어느새 형님. 동생 비슷하게 되신 거야. 그 날이후 '행복의 시간'으로 나는 초대를 받았어. 유독 내게 신경을 많이 써 주시더라. 방과 후에 한 줄로 서서 교실 문을 나서는데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 시절에는 왠지 그런 게 행복감을 느끼게 했어. 나만 그랬던가? 아무튼 담임 선생님이 관심을 보이고 칭찬을 일부러라도 해 주시니까 차츰차츰 같은 반 아이들도 내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어. 이런 것도 무슨 법칙이 있을 텐데. 잘 떠오르질 않네. 대학교 교양으로 들었던 '심리학 개론' 시간에 얼핏 그 당시의 일을 연상했던 것도 같은데 말이야.
담임 선생님이 한 번은 뜬금없이 수업시간에 나를 '영국 신사' 같다고 아이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시는 거야. 한마디로 오버하신 거지. 그런데 애들한테는 그게 먹히더라. 특히 여학생들에게 호감도가 급상승 하기 시작했어. 괜히 가만있는 내게 말을 걸었고 내 착각인진 몰라도 내 앞에서 많이들 웃고 그러더군. 이후로 학교 생활에 재미가 붙었고 학교 다니는 일이 막 즐거워지기 시작했어. 과장 조금 보태자면 아침에 학교에 가는 것이 내게 설렘으로 다가왔었지. 이런 걸 연구해서 '교육학 이론'에 도입해 보면 어떨까? 그런데 말이지.. '아이러니'한 건 4학년 때 반 친구들이 온전히 학년만 바뀌어서 5학년이 된 건데 어쩌면 나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놀라운 일인 거야. 게다가 영국 신사라니. 그 날이후 나는 영국 신사처럼 지내야 할 것 같은 강박증도 생겼고 말이지.
그러다가 그 일이 생겼어. 반 여자애들 중에 집에서 서점을 했던 아이가 있었는데 폐업을 했는지 반 아이들에게 새 만화책을 가져와서 한 권당 500원에 팔기 시작했어. 당시 어린이 잡지가 1,800원 정도였으니 나름 싸게 팔았던 거지. 나도 무척 사고 싶더군. 미리 이야기했지만 한 학년 전에도 그랬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도 그 버릇이 이어졌는데 교과서에 항상 낙서를 즐겨했던 터라 너무 강렬하게 그 아이에게서 만화책을 사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 해서 결국에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500원을 받아 그 아이가 가진 만화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권을 샀었지. 그걸 가방 속에 넣어 두고는 온종일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끼며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어.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런데 마지막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생전 안 그러시다가 무슨 마음을 잡수셨는지 책가방 검사를 한다고 하시는 거야. 가방 속에 있는 걸 다 꺼내 놓으라고 하시더라. 내 가방 속에는 거금 500원이랑 바꾼 빳빳한 새 만화책이 감춰져 있었는데 말이야.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단지 11살 짜리였던 내가 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말았어. 돈도 돈이지만 담임 선생님을 절대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아. 선생님이 지구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영국 신사'라고 까지 했는데 만화책이나 가지고 다니다 압수당하는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만화책이 그렇게 가지고 다니면 안 되는 금기된 물건이었나 싶기도 하네.
난 잽싸게 가방 속에 감추어 두었던 그 만화책을 꺼내 그 여자 아이한테 환불을 요구했어. 지금 생각해봐도 얼굴이 화끈 거리는군. 그 당시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애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나를 형편없고 비열한 사람으로 여겼을까? 지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솔직히 그럴 용의도 있지만 당시 나는 담임 선생님과의 그 관계를 절대 깨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어떤 강박 관념으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어. 내가 잘못 생각한 거지. 변명할 거리가 없네. 암만 생각해 봐도. 물론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것들과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에게서 샀던 만화책들은 모두 압수를 당했어. 내 양심과 함께 말이야.
몇 달 뒤에 난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는데 그 여자애와는 정말 그 이후로 단 한마디도 나누어 보지 못했던 것 같아.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겠지. 어린 마음에 화해를 몇 차례 시도해 보려고도 했는데 그게 쉽게 안되더라. 내가 너무 마음에 큰 상처를 준거야. 그 아이에게. 뜬금없는 얘기지만 얼굴도 이쁘게 생겼었는데 너무 속상하더라.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든. 만화책 사건 전까지 말이야. 어떤 영국의 왕은 사랑을 위해 왕의 자리도 포기했다고 하던데 나는 되지도 않는 영국 신사 자리를 지키려고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한 거야. 아.. 너무 창피하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느냐고? 내가 살아 보니까 자꾸 후회를 남기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게도 되는데 그 대부분의 경우가 뭔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었어.
"지나고 보면 결국 만화책 한 권의 가치나 실체 없는 영국 신사 같은 그런 바보 같은 걸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정작 나에게 소중한 건 또 잃어버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