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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지

기억은 앙금처럼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by 오스만
실로 8년 만에 만난 대학 시절의 동기 한 명과 반주를 갖춘 저녁식사를 오붓이 즐기다 부지불식간에 당신의 이름이 제 입에서 호명되었고 당신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소나마 그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세월이 지났고 마흔도 중반의 나이에 들고 보니 저 역시 이 나이가 겪게 되는 기억의 왜곡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하겠지만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가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신께서 동의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가지고 있지 않답니다.


첫 번째 편지는 1990년 4월에 씌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1학년을 끝내고 군입대를 염두에 둔 휴학상태였는데 신입생이 포함된 ‘학과 단합대회’를 우연히 따라가게 되었고 청평에서 돌아오는 통일호 열차 안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앉은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어색할 수 있었던 그 순간 환하게 웃음을 보여 주던 그 여학생에게 저는 소년 같은 설렘을 느꼈답니다.


친하게 지내던 대구 출신의 J형에게 어렵게 부탁을 해 그 여학생을 따로 만났죠. 당시 학교와 인접한 전철역 앞에 ‘모스크바’라는 경양식 집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그녀를 보았답니다. J형을 따라 들어오던 그 여학생이 저를 보며 웃던 모습이 아직껏 생각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당신이군요. 당신인 줄 알았어요……”하는 웃음으로 당신은 저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답니다.


전철을 타고 내린 종로5가 골목길을 걸어 ‘바쁘다 바뻐’라는 연극을 같이 보게 되었어요. 아직도 생각이 나는군요. 그 좁디 좁은 공간을 꽉 채웠던 사람들의 발 냄새와 바로 눈 앞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배우들 모두를 말이죠.


인근에서 늦은 저녁을 나누며 가졌던 당신과의 대화. 대학교 인근의 H여고를 졸업했으며 학교에서 부회장을 했고 기타 치는 취미를 가졌다는 당신은 참 매력 있는 아가씨였죠. 밤이 늦어 집이 있는 ‘능동’에 돌아가야 한다는 당신과 바래다 주겠다는 저의 실랑이 속에서 당신은 집에 아직 전화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총총히 떠나 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당신을 보기 위해 과 대항 체육대회에 앉았던 저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오던 당신을 멀리서 알 수 있었고 당신은 저와 시선을 마주치고 멀리 달아나 버렸죠. 그래서 그 첫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방적 내용으로 약속을 잡았지만 일말의 기대를 가졌었고 그 편지가 당신에게 온전히 전달될 것을 역시 믿었지만 당신은 끝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해의 9월 가을비 내리던 날 저는 논산훈련소 행 열차를 타고 입대를 해서 30개월간의 길고 지루했던 군 생활을 마쳤고 1993년 3월 복학을 했는데 이듬해인 1994년 봄, 다시 학교에서 당신과 마주치게 되었죠.


중간고사 기간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중 간식을 하러 가던 무리 중에 당신이 함께 했죠. 어쩌면 당신은 저를 한 명의 낯 선 복학생 정도로 여겼을지 모를 일이지만 저는 “더 예뻐졌네……”하며 애써 감정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당신의 자리를 찾았을 때 당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와의 대화를 외면했었죠.


유치했던 두 번째 편지에 대한 기억을 굳이 하자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닮은 구름이……’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것이었고 교직원을 찾아가 알아 낸 당신의 주소로 발송된 그 편지는 역시 아무런 답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참 제가 못나 보이던 시간이었죠. 당신은 항상 저를 외면했고 저는 당신에게 한발자국도 다가가기 힘들었음을 혹시 알고는 있었나요? 당신이 처음 보여준 그 친절하고 따뜻했던 미소가 왜 차갑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고 그 한해 동안 당신과 함께 들었던 몇 개의 수업마저도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 버렸죠.


당신에게 보내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편지에 비해 세 번째 편지는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세 번째의 이 편지는 앞선 두 차례의 편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듯 해요. 두 차례의 편지에 젊은 갈망과 어린 연모가 묻어 있었다면 세 번째 편지에는 당신을 향했던 저의 진정성과 묘한 원망 같은 감정들이 묻어 있는 듯 하군요.


술기운을 빌어 그녀의 근황이라도 한 번 알아봐 달라는 저의 부탁에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그 친구가 당신의 주소를 어제 전해 주네요.


제가 누구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더라도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롯이 저의 잘못이죠. 그리고 세 번째의 이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 당시 제가 연정을 품었던 그 소녀에 대한 진정성만큼은 꼭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그날 청평에서 청량리까지 오는 통일호 열차를 타고 웃음이 이뻤던 그 여학생의 얼굴을 제가 다시금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늦은 밤 시간 귀가하다 오늘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지하철에서 도둑 맞았습니다. 바보같이. 참 이상한 날이네요. 잃어 버린 건 시계인데 마치 시간을 도둑 맞은 기분이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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