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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수종사에서 만난 그녀

by 오스만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시편 72:6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비 내리는 날이 좋았어. 집 앞에 작은 도랑이 하나 흐르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는 날은 그 도랑물이 불어 나 물 흘러가는 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집 안에 까지 들어왔지. 그런 날 소나무 가지를 꺾어 도랑 위에 띄우면 송진이 물 위에서 무지개색으로 곱게 퍼져 나가는데 그걸 바라보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어. 비를 맞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 어쩌면 난 비와 아주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던 거야.


사람에 따라 성격도 제각각이고 어떤 현상에 대한 취향도 다르겠지만 비를 좋아하는 나에 비해 처음 만날 때의 그녀는 비 내리는 날이 싫다고 했지. 몇 번인가 그 이유를 물으니 비가 내리는 날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이 너무 싫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연두색 빛깔의 삼단 우산을 쓰고 빗 길을 걷는 그녀의 옆모습은 너무 근사해 보여서 비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지.


그녀는 자신을 '집순이'라고 불렀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으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고 얘기했지. 게다가 비가 내리는 날은 거의 집에서 꼼짝을 않는다 했어. 몸이 느끼는 '축축함'이 싫다고 해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반대로 비가 내리는 날은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본능 같은걸 느끼는 편이었지.


특히 조명이 어두침침한 2층 찻집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살짝 열어 둔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마냥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한 거야. 불꽃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마치 바람과 불이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돼. 이상하지.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비가 내리는 날 그런 그녀와 처음 만났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라는 절을 찾아간 건 4월 두 번째 금요일이었어. 양평 가는 길에 지도 앱을 켜 두고 있었는데 주변 명소로 그곳이 소개가 되어 있더군. 양평에서 볼 일을 마치고 보니 시간이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있었어. 마침 오는 길에 봐 두었던 수종사 생각이 나서 가는 길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 이야기에 무척이나 마음이 동했어. 게다가 비 내리는 날 산 꼭대기의 절을 찾아간다는 일이 은근한 설렘을 주었거든.


비가 내리는 날 수종사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절까지 올라가는 길이 너무 가파르더군. 산길을 돌아가면서 낸 길이 아니라 경사를 급하게 깎아 낸 길이라 차를 가져간다 해도 자동변속이 아니면 무척 난감할 거야. 더군다나 길이 미끄러워 걸어서 올라간다는 건 더더욱 힘들어 보였지.


아무튼 절까지 난 길을 따라 가 겨우 차를 주차하고 돌계단을 올라 몇 분간 비를 맞고 걸으니 절의 입구가 보였어.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더군. 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좇아가니 차를 마시면서 산 아랫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방이 하나 나왔어. 차를 우려낸 물을 마시며 안개가 몰려온 풍경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너무 내게는 특별한 시간이었어. 딱 내 스타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밤이 내려앉는 강물이 하얀 솜이불 같은 안개를 덮고 있었어. 창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각양각색의 모양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창의 표면에서 부서져 파편을 여기저기 남기는걸 물끄러미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어.


그때 스님 한 분이 오셔서 "이제 그만 돌아 가실 시간이 되었다"라고 하더군. 아쉬웠지. 그리고 "혹 차를 가지고 오셨으면 다른 한 분을 산 밑 버스 정거장 까지만 태워 줄 수 있는지" 묻더라. 그러겠다고 했었지. 밤이 되어서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어.


그렇게 소개를 받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어. 그녀는 자신을 태우러 와야 할 차가 다른 일로 오지를 못해 절에서 운행하는 차를 타고 내려가야 했는데 마침 내가 차를 가져와서 다행이라며 연신 감사하다 했지. 절에서 쓰는 차는 저녁 예불이 끝나는 시간에 운행을 해서 한 시간 남짓 더 기다려야 했다면서. 비가 내리는 날 여자 혼자 인적 없는 버스 정거장에 두고 갈 수 없어 행선지를 묻자 청량리 인근에 내려 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 있다고 했어. 비가 내려서 그런 건지 양수리 넘어가는 양수대교 인근부터 차가 막히더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그녀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가자고 했어. 어차피 차가 막히는 시간이니 식사를 하고 조금 늦게 출발하면 어떻겠느냐는 논리였지. 물론 밥값은 차비 대신 자기가 내겠다고 했어. 마침 '능내' 근처에 자기가 아는 밥집이 있다고 하길래 능내에서 차를 빼서 '다산 정약용 생가' 이정표가 보이는 방향으로 향했지.


고만 고만한 한정식집이랑 매운탕집이 여기저기 몰려 있는 게 눈에 띄더군. 그녀가 안내한 곳은 북한강이 바로 코 앞에서 찰랑거리는 곳이었어. 본 건물 앞에 비닐하우스로 가건물을 만들어 손님을 받고 있었는데 비닐 지붕 위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두 시간 남짓 보내었던 그 시간이 너무 편안하게 느껴지더라. 그녀가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시자 해서 그러라 했는데 나도 분위기 탓인지 몇 잔을 받아 마시고 말았어. 운전은 물 건너간 거지. 대리를 부르려 했는데 대리 잡기도 힘들더군. 금요일이고 또 시골이라 그랬던가?


식당 주인에게 이야기해서 인근 민박집 방을 2개 구했어.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 12시를 30분 정도 남겨두고 있었어. 봄 비치고는 제법 빗방울이 굵었지. 강가에 정자 같은걸 세워 두었는데 거기에 앉아 강 건너편 불빛을 둘이서 바라보고 있었어. 술 깨면 들어가자고 잠시 들렀는데 좀처럼 그만 들어가자는 말을 서로 하지 않았지.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생판 모르던 남자와 여자가 자정이 된 시간에 인적이 드문 강가에 앉아 함께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어. 그녀가 어깨를 살짝 움츠리길래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주었지. 그녀는 혼자 말인지 문득 한마디 하더군.


"이상한 날이네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라니..."


그 날 이후 가끔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았지. 메신저 등록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였어.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그녀가 예술의 전당에서 '간다라 미술전'을 하는데 함께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묻더군. 그다지 그쪽 분야에 관심은 없었는데 거절하기도 힘든 애매함이 있었어.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서 경험한 미술품 전시회는 또 느낌이 틀리더군.


전시물 한 점 한 점 그녀의 안내로 아주 흥미롭게 시간을 보냈지. '헬레니즘' 이라든지 '헤브라이즘'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말이야.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졌어. 6월 중순이었는데 제법 굵은 비였지.


함께 차를 타고 양재에서 과천 방향으로 차를 향했어. 그 날 따라 유난히 그녀는 말이 없더군. 라디오에서 '쉘부르의 우산'OST가 흘러나왔어. 차 창으로 흘러내리던 빗물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어.


"슬픈 멜로디죠... 쉘부르의 우산."


생뚱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지. 소리 없이 울고 있었어.

여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척 당황스럽더군. 왜 우느냐고 물어보지를 못하겠더라. 인덕원에서 백운호수 쪽으로 방향을 돌려 호숫가 2층 카페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어. 비가 오는 날인데도 여기저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


음식을 시켰는데 그녀가 잘 먹지를 못하더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고 물으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생각이 별로 없다고 했어. 맥주를 한 잔 하겠다고 해서 주문했는데 맥주는 제법 마시길래 몇 번인가 더 주문을 해야 했지.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계산을 치르고 나오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어. 호숫가를 밝히고 선 가로등 불빛들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 보였지. 차에 시동을 걸고 와이퍼로 빗물을 씻어 내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약혼을 했는데 그 사람이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사고를 당했어요. 사고 나기 3시간 전에도 통화를 했었는데... 서울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하곤 밤새 연락이 없었죠. 아침이 되어서야 그쪽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대학병원 영안실이었죠.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 곳이.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빗길에서 과속을 했다고... 서울 도착해서 전화하라고 했던 제 말이 너무 후회스러웠죠..."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지.


"그 사람 보내고 한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거든요. 학교도 1년 휴학을 해서 졸업이 한 해 늦어졌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발을 떼기가 힘들었어요."


그녀가 처음 비 오는 날이 싫다고 말 한 이유를 어렴풋이 나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어.


"아저씨를 수종사에서 처음 만난 날이 사실은 그 사람 기일이었어요. 1년에 한 번 그곳에 들러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거든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강가 어디쯤엔가 예쁜 집을 짓고 살자고... 꽃밭도 가꾸고... 우리 아이들 태어나면 그네도 만들어 주자고 했는데."

눈물로 가득 찬 눈망울을 들어 여기까지 말을 마친 그녀가 멋쩍게 웃었어. 차 지붕으로 퉁. 퉁 거리는 빗소리가 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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