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42년 독재는 어떻게 무너져 갔는가?
2008년 9월 1일
리비아 혁명 40주년이다. 휴일이고 40년 전 스물일곱 나이의 '무아마르 카다피' 대위가 동료 15명과 함께 터키로 외유를 떠난 국왕 '이드리스 1세'를 왕위에서 밀어 내고 이집트 나세르식 혁명을 완수했던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혁명 당시의 암호명은 '까르유니스'. 후일 벵가지 대학의 이름이 까르유니스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0주년 혁명을 맞은 리비아는 곳곳에 지도자의 대형 사진과 녹색 국기를 내 걸었다.
2008년 12월 24일
트리폴리 서쪽의 유적지 '사브라타'를 방문했다. 차로 4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라고 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원형극장의 돌계단에 앉아 있으니 무대 뒤로 푸르게 넘실거리는 지중해가 내려다 보였다. 달빛 아래 사브라타의 주민들은 지중해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배우들이 연기하는 익살과 탄식의 순간들을 즐겼으리라. 아주 소규모의 관광객들이 바닷가를 줄지어 거닐고 있었다.
2009년 1월 15일
리비아 트리폴리 시내에 이틀 연속 비가 내렸다. 도로에 배수 시설이 없어 도시 기능이 마비되는 큰 비였다. 숙소 주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도로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다. 왜 필요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부분을 국가에 요구하지 않느냐 하는 게 내 질문의 요지였고 숙소 주인은 두 어깨를 잔뜩 움츠려 보이더니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들어줄 시스템이 없으니...."
2009년 3월 8일
미스라타 인근의 '홈즈'라는 도시를 찾았다. 로마 최대의 유적지인 '렙티스 마그나'가 위치한 곳이다. 카메라를 가진 입장객에게는 돈을 다소 더 받았다.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룰이 그렇다고 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때 이 곳에서 대리석을 가져다 썼다고 했다. 이 곳 출신으로 후일 군인 황제가 된 제정 로마시대의 '루시우스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홈즈 시내가 바라 보이는 바닷가에 앉았다. 봄바람이 불어왔다. 리비아에 봄이 오고 있었다.
2009년 5월 29일
트리폴리 공항에 내려 짐을 찾아 나오자 주차장 입구에 걸린 국가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활짝 웃는 대형 사진이 사람들을 먼저 맞았다. 사진 밑으로 아랍어 글귀가 굵게 적혀 있었다.
"혁명 41주년. 자마히리야 (리비아식 민주주의)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2009년 7월 3일
시내 서점에 들렀는데 우연히 리비아 부족들의 족보책이 눈에 띄었다. 부족 중심의 국가로 알고는 있었지만 족보책을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생소했다. 한 권 사서 볼까 싶었으나 몇 번 책장을 넘겨 보고 포기했다. 빽빽하게 적힌 그 책의 내용이 너무 무거웠고 읽어도 그 복잡한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카다피는 어떻게 이 족보들 간에 얽힌 관계를 조율해서 41년의 권좌를 지켜내는 것일까?
2009년 10월 20일
하라스 발라디 (지역 위생 감찰기관)의 호출을 받았다. 인구 8만의 도시 '데르나'에는 5개의 경찰서(중앙 경찰서, 형사 담당, 민사 담당, 농림, 교통경찰)가 있고 하라스 발라디를 비롯하여 엠 카리지 (외국인 감찰), 아믄 다클리 (보안대) 등의 유관기관이 있는데 한 번씩 방문을 해 보면 대부분 시설이 너무 낙후했다. 석유를 팔아 번 돈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2010년 1월 19일
트리폴리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찍이 '지중해의 인어'라는 별칭을 가진 아름다운 미항이 아니었나? 트리폴리 박물관과 녹색 광장을 지나면 유럽식 카페테리아가 줄지어 있고 그 뒤로는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지중해성 기후 탓에 간간히 비가 내렸고 가로수로 심어진 오렌지 나무의 오렌지가 바닷바람에 흔들대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이방인의 향수가 짙게 느껴졌다.
2010년 4월 10일
알베이다 공항에 업무차 들렀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항 건물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행한 리비아인 운전원에게 물으니 석방된 정치범들의 가족들이라고 했다. 아버지 카다피가 잡아 가둔 정치범들을 아들인 '사이프 이슬람'이 풀어 주고 있다 했다. 아들의 관대함을 부각하여 순조로운 후계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결국 카다피식 민주주의는 그의 동갑내기 친구인 김정일식 후계 방식을 답습하는 것일까? 공항에 걸린 카다피의 사진 앞에서 운전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2010년 5월 18일
금요일 휴일을 맞아 동료 한 명과 인근으로 캠핑을 갔다. 돌 사이에 숯을 놓아 밥을 하고 밥이 된 다음에는 양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였다. 인근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경비군인 한 명이 '클라쉬니코프' 소총을 둘러메고 나타났지만 한차례 악수를 서로 나눈 후 그는 다시 사라졌다. 리비아는 치안이 무척 안전한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2010년 7월 14일
리비아에는 2개의 이동 통신사가 있는데 '알마다르'와 '리비아나'다. 둘 다 국가가 관리하는 통신사라 두 회사 간 구분의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명색이 독재 국가로 분류된 이 나라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통신 행위가 이루어져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동통신의 가입과 사용은 수월했다. 언젠가 이 나라에 큰 사단이 벌어진다면 그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위성방송과 인터넷 그리고 이동통신의 힘에 의한 것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10년 8월 2일
리비아는 동전 사용이 드물다. 리비아 어느 곳에서도 동전이 투입되는 자판기를 본 일이 없다. 리비아의 화폐 단위는 '디나르'이고 1 디나르 밑으로는 소액단위 '디르함'을 사용하는데 과거 왕정 시대에는 이집트 화폐 단위와 같이 '주나이흐'(이집트에서는 '기니'라고 함)를 사용했고 언어의 습관 탓인지 나이 든 리비아인들이 '디나르'를 '주나이흐'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리비아의 지폐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5 디나르와 10 디나르를 제외한 모든 지폐에 카다피의 얼굴이 있다는 것인데 5 디나르에는 낙타 2마리가 그리고 10 디나르에는 사막의 라이언의 주인공 '오마르 목타르'가 도안되어 있다.
2010년 9월 12일
한국에서 찾아오신 손님 몇 분을 모시고 알베이다 지역의 '키레네'유적과 '아폴로니아'항이 있는 수사를 방문했다. 기원전 570년경 지금의 그리스 산토리니인 '티라'섬에서 대규모의 이주가 있었고 그들이 세웠던 도시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곳이다. 유네스코 유적으로 등록된 곳이지만 보존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집을 짓는 인근의 주민들이 유적지의 석재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국가의 문을 활짝 열어 지중해 인근의 자연환경을 잘 활용한다면 분명 리비아는 세련된 국가로 빠르게 탈바꿈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단상에 잠겨 보았다.
2010년 10월 26일
트리폴리 시내 카다피의 관저인 '밥 알아지지아' 앞으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동행한 리비아인 이야기로는 경호원들이 사용하는 곳으로 출동이 걸리면 5분 안에 모두 관저 안으로 집결한다고 했다.
2011년 1월 5일
남부 최대의 도시 '페잔'을 방문한 카다피가 시민 간담회 자리를 가졌고 이 자리에서 한 남자가 주택부족 문제를 질의했다. 카다피는 "현재 전국적으로 30만 호 주택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무주택자들의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과거 모택동의 홍위병 동원과도 같은 의도된 연출이었나? 그날 밤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지역 주택 공사 현장 곳곳에 인근의 주민들이 난입해 공정이 절반 이상 진행된 곳마다 자신들의 이름을 적고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했다.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로 번지는 변화의 불길을 카다피는 다른 이슈를 만들어 덮으려 했던 것이었을까? 근 1주일가량 국가 공권력은 이들의 행위를 방관했다.
2011년 1월 13일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벵가지 시내의 시위를 정부군과 치안당국이 강경하게 진압했다는 위성뉴스가 방영되었다.
2011년 1월 14일
튀니지 대통령 '벤 알리'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했다. 튀니지.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 정세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1년 1월 25일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가 부통령 '오마르 술라이만'의 담화를 통해 사임의 뜻을 발표했다. 카이로 시내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들이 기쁨의 함성과 함께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고 있었다. 뭔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정확하게 그게 뭔지를 모르고 있는 순간을 보내고 있다.
2011년 2월 1일
아침에 들른 트리폴리 시내 '다트 이마드'빌딩에 위치한 '자마히리야'은행에서 은행 매니저에게 리비아 정세를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리비아는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곧 상황 수습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2011년 2월 5일
다음날 귀국하는 귀국자와 함께 트리폴리 시내 찻집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며 이집트 상황의 심각함과 리비아가 받게 되는 그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비아 체류 경력이 꽤 있다는 그 귀국자는 절래 절래 손을 흔들며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리비아 동. 서의 길이가 1,300킬로 미터라 동부에서의 반정부 상황이 절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과연 그럴까?
2011년 2월 10일
한국에서 출장 온 손님들과 함께 트리폴리 시내 관광에 나섰다가 한 리비아인으로부터 목에 걸린 카메라를 지적받았다. 지금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요점이었다. 터키 국적의 '릭소스' 호텔에 손님들을 안내했고 로비 옆에 붙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거리는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1년 2월 15일
한국 대사관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을 찾은 한 리비아인이 절대 야간 외출을 삼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트리폴리 시내는 카다피 사진을 내건 차량 행렬들이 줄지어 관제 데모를 하고 있었다. 흉흉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곧 트리폴리가 주와이야 등지의 외곽에서 넘어온 반 까다피 세력에게 함락될 것이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2011년 2월 17일
반 카다피 진영은 이 날을 '분노의 날'로 정했다고 했다. 벵가지. 알베이다. 토브록. 데르나. 미스라타. 아즈다비야 등의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리비아 정부군은 이를 강하게 진압했다.
2011년 2월 20일
카다피의 둘째 아들이자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이프 이슬람'이 리비아 국영방송에 출연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지만 이날 제2의 도시인 벵가지가 결국 해방되었다.
2011년 2월 22일
알자지라 방송으로 카다피의 특별담화가 발표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집무실인 '밥 알아지지야'에서 그는 이번 사태가 알카에다의 추종 세력인 알베이다. 데르나. 토브룩 등에 숨어 있는 악마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한 뒤 구석구석. 골목골목. 마을 마을을 뒤져서 이들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데르나 시민들은 카다피의 얼굴이 비추는 빔 프로젝트가 향한 벽을 향해 신발을 집어던지는 모습이 그의 연설과 함께 번갈아 방영되고 있었다.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 구역은 이미 반 카다피 진영이 장악하고 있다는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2011년 2월 23일
아침 일찍 운전원의 집에 들렀다. 거리는 고요했고 차들의 통행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용무를 마치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트리폴리는 안개가 자욱했다. 폭풍전야의 모습이었다.
이웃에 사는 남자가 보여 인사를 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손을 흔들어 화답을 해 주던 사람이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비로소 직감되었다. 숙소에 있던 맥주를 라면과 함께 먹으며 방송에 집중했다. 리비아는 지금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2011년 2월 24일
대사관 영사과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리비아 주재 한국 회사 직원들의 대피를 위해 전세기를 띄웠으니 오전 10시까지 트리폴리 공항으로 나와 대기하라는 전갈이었다. 차에 짐을 싣고 리비아 운전원 '쌀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선 거리는 경비가 삼엄했다. 완전군장을 한 리비아 군인들이 500미터마다 검문소를 세우고 통행하는 차량과 탑승인원을 일일이 검문했다. 간신히 트리폴리 공항의 입구로 차가 들어서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내 눈 앞에 벌어져 있었다. 리비아에 거주하는 이집트인 근로자들이 트리폴리 공항 앞에 텐트를 치고 출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집트 정부가 보내는 전세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난민촌을 방불케 했고 이를 통제하는 리비아 측 경비 인원들은 손에 쇠사슬과 채찍을 휘두르며 이들을 제지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의 휴대폰이 이내 공항 경비대의 손에 넘어가 압수당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공항 입구에서 한국인 대기소가 임시로 꾸려졌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오후 2시경 저녁 7시로 대기시간이 변경되어 숙소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알자지라'방송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벵가지와 미스라타의 근황들이 반복되며 방송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시내에서 총성이 연속으로 들려왔다. 7시에 공항 모임장에 다시 나왔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밤을 꼬박 새우는 시간이었고 밤의 정적 속에서 쉴 새 없이 총성이 울렸다.
2011년 2월 25일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는 트리폴리 공항에서 만 하루를 대기하였고 별도의 여권 검사 없이 외교부에서 전세를 낸 이집트 카이로행 B 777 항공기가 트리폴리 공항을 출발해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탑승했던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며 옆에 앉은 동료들과 악수를 나누는 등 서로 축하의 말을 나누었다.
2011년 10월 20일
알자지라 뉴스의 속보로 카다피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향인 중부 도시 '씨르트'의 은신처에 숨어 있다 다수의 경호원들과 함께 숙소를 옮기던 도중 반 카다피 연합군의 폭격을 받고 인근의 시민 군에게 발각되어 급하게 도로와 연결된 배수구 안에 숨어 있던 그를 성난 시민군들이 강제로 끌어내는 장면이었다. 카다피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절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카다피가 지니고 있던 황금 권총을 들어 보이며 환호하고 있었고 카다피는 웃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도요타 픽업의 화물칸에 축 쳐진 육신이 옮겨졌다. 이미 깊은 총상을 입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고 가발이 벗겨진 그는 탈모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씨르트와 수도 트리폴리 중간에 위치한 도시 '미스라타'의 한 푸줏간 냉동고로 옮겨졌고 넷째 아들인 국가 정보책임자 '무타심'의 시신 옆에 눕혀져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2016년 9월 1일
카다피가 살아 여전히 리비아의 국가 지도자로 남아 있다면 올 해로 리비아는 혁명 48주년을 기념하였을 것이다. 카다피가 부재한 지금 리비아는 과연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카다피가 들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시민들은 상자의 가장 밑바닥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희망을 언제쯤 발견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