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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밥상

'별 두 개의 사연'

by 오스만

아들 내외의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시간이었다. 남편과의 사별 이후 얼마나 이를 악 다물고 키운 아들이었나? 착실한 아들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말썽 한 번 피우지 않고 자란 순한 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아들이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 왔다. 작지 않은 키에 호리 한 몸매 그리고 웃는 인상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만나게 된 아가씨라고 했다. 내게 그동안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사귄 지 꽤 된 사이로 보였다. 싫지 않은 아가씨였지만 웃는 얼굴 사이로 문득 그늘 같은걸 느꼈고 그녀가 부모 없이 자라 어렵게 고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둘 사이를 반대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은 구김 없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여자와 맺어지기를 나는 바랬다.


하지만 젊어서 남편을 잃은 것이 내 의사와 무관 했듯이 나의 반대에도 아들은 고집을 꺽지 않았고 둘은 쓸쓸한 결혼식을 올렸다. 데면 대면한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아들의 여자에게 마음이 열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아이의 부모가 주지 못했던 사랑을 내가 주리라 마음먹었지만 결혼 이듬해 태어난 아들 '정식이' 하나를 남기고 아들 내외는 정식이가 8살 되던 해 겨울, 설악산을 다녀오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렸다. 어린 정식이를 안고 아들 내외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던 길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주저앉고 싶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식이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고 그런 정식이를 안고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세상에 이제 나와 정식이 너 둘 뿐이로구나."


아들 내외의 전셋집을 정리하면서 나는 식당을 하나 차렸다. 크지 않은 식당이었지만 양평 국도변에 차려진 식당은 '할머니 집'이라는 간판이 걸리고 꾸준하게 매상을 올리는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정식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루하루 나는 힘겨운 시간을 잊으며 지냈다. 아들을 닮아서인지 중학교 들어가서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한 뼘은 더 키가 크더니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지는 정식이에게서 나는 아들을 느꼈다. 식당 자리는 봄이면 벚꽃이 국도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가을이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둘러 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받아 들고 학교를 향하던 정식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난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다시금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식이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한 번 다녀 가시라고 했다. 놀란 마음에 이튿날 식당 문을 닫고 학교를 찾았다. 입학식 날 이후 처음 방문한 학교였다. 담임은 30대 중반의 수학 선생님이라고 했다. 정식이가 최근 성적이 많이 떨어지고 담배를 소지하다 적발되는 등 예전과 다른 행동 등이 자주 관찰되니 이런 시기에 집에서 관심을 더 가져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담임의 의견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식당 일에 한동안 정신이 팔려 정식이에게 내가 소홀했던가? 아들 내외의 얼굴이 떠 올랐다가 다시 정식이의 웃는 모습이 그 위로 오버랩되었다. 모든 게 나의 잘못 같았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그날 밤 정식이를 불러 학교를 다녀온 얘기를 꺼냈다. 정식이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그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어릴 적 손을 잡고 시장을 한 번 데려 나가도 뭘 하나 사달라며 떼를 쓰는 법이 없는 아이였다. 나는 그런 정식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떼도 부리고 어린 티를 좀 냈으면 하는 마음도 내심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참 의젓하다고 칭찬들을 많이 했고 그런 주변 반응이 마냥 싫지도 않았다. 부모 없이 자란다는 소리를 정식이가 듣기를 원치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 역시 티가 난다는 소리는 더더군다나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정식이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정식이가 집을 나갔다. 이틀째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째 무단결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패거리를 지어 다니던 아이들과 심하게 다투었다고 했다. 그중에 한 명과 주먹다짐을 했는데 그 아이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정식이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정식이가 사과 없이 버티자 ""부모 없이 자라 그런 거니?"라는 다친 아이 엄마의 말을 듣고 학교를 뛰쳐나간 이후 계속 결석 중이라 했다. 내가 둔해서 그런 일이 있었던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어린것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 일인가?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물 한 모금 입 안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정식이가 없는 그 아이의 빈 방에 불을 켜두고 밤을 지새웠다. 문 밖으로 작은 소리라도 들릴라 치면 "정식이니?"하고 열두 번은 더 밖을 내다보았지만 정식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삼일째 되던 날 밤 11시가 다 되어서 누군가 식당 문을 두드렸다. 정식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식당의 간판 불을 켜 두고 있었는데 누군가 영업 중인 줄 알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식당 문을 열어 영업이 끝났다고 하자 50대 중반의 남자는 간청을 했다. 점심때를 놓치고 저녁식사도 못했으니 간단히 되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허기만 면하게 해달라고 했다. 3일째 식당 문을 닫아 마땅히 차려 낼 음식이 없다고 했으나 그 남자의 사정도 참 딱해 보였다.


하는 수없이 손님을 자리에 앉히고 주방에 들어와 보니 정식이가 돌아오면 차려 주려고 준비해 둔 밥상이 눈에 들어왔다. 팥물에 찹쌀 섞은 밥 한 공기와 새우젓으로 간을 한 계란찜, 그리고 정식이가 평소 즐겨 먹던 무 고등어조림과 멸치 국물 청국장을 데워 고들빼기김치와 함께 밥상을 차려 내자 그 중년의 남자는 숨도 쉬지 않고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누룽지를 끓여 내자 그 남자는 자기가 방금 먹은 메뉴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고 내가 식단에 없이 우리가 평소 먹는 음식이라 하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남자가 누룽지를 마시는 동안 난 집 나간 정식이 이야기를 얼핏 꺼내었고 남자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며 만 원짜리 3장을 내 손에 한사코 쥐어 주고는 여러 번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정식이는 그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서울로 전학 간 친구 집에 이틀 있었다고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용서를 빌었다. 정식이와 나는 서로 부둥켜 안은채 울었다. 있는 재료로 정성껏 차려 낸 아침밥을 두 그릇 비운 정식이는 하루 나절 잠에 빠져 있다 다음날 아침 걱정하지 마시라며 학교로 향했고 오후 학교를 방문한 내게 담임은 1주일 교내 봉사로 징계를 최소화했으니 안심하라고 나를 위로했다. 다시 정식이와 나는 예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일까?


며칠 후부터 이상하게 식당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준비한 식재료가 동이 나 저녁 준비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자리가 없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서 손님들은 입장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르던 내게 젊은 한 여자 손님이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여 주며 기념촬영을 요구했다. 그 손님이 보여 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할머니 식당의 놀라운 정식 - 당신이 세계의 어디에 있든 점심과 저녁을 거르고 맛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훌륭한 식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기드 미슐렝은 별 두 개를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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