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 Maker'
한동안 잠에 취해 있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멍하니 현실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는데 그때 그 시간이 그랬다. 간신히 눈은 떴는데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건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 말이다. 창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는 모습을 한 동안 바라 보고서야 지금 '사라고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 내었다. 바르셀로나 '상츠역'에서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타느라 잔뜩 긴장해 있다가 자리를 찾아 앉고 나서는 스르륵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그만 골아떨어졌나 보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아침시간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 사라고사 가는 길에 이렇게 비가 내리는 걸 기차 안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금세 수그러들 비는 아닌 듯 보였다.
기차가 사라고사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는 짐칸에 올린 가방의 행방을 우선 살폈다. 드문 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승객들의 수만큼이나 짐칸은 한산해 보였고 여행 중 눈에 익어 버린 감색 캐리어 가방이 금세 눈에 들어와서 순간 반가웠다. 낑낑거리며 가방을 통로에서 간신히 끌어내어 활짝 열리는 기차 문을 몇 걸음 내려서자 천정부터가 이국적으로 생긴 사라고사 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확신 없이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이 나를 다시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 어쩌면 보다 더 정확할 테지만.
비를 바라보며 보내는 시간은 마냥 좋지만 비를 맞으며 어딘가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것도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질질 손에 잡아끌면서 길 모르는 낯 선 땅의 여기저기를 헤매어야 한다면 더군다나. 할 수 없이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로 향해야만 했는데 기차역과 시내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택시 기사는 뭔가 친근감의 표시를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선뜻 말을 걸진 않았고 택시가 정지 신호에 한 번씩 걸릴 때마다 나는 비가 내리는 유리창과 빠르게 올라가는 미터기의 요금을 시계 추처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차를 타기 전에 보여 준 예약 해 둔 숙소의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초입에 차를 세웠다. 미터기를 확인하고 내가 셈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씩 웃으며 '꼬리?'하고 물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악수를 청하더니 골목의 초입에서 보이는 초록색 간판을 손으로 가르쳐 주었다.
'빌라 데 아우구스타'의 입간판을 확인하고 통으로 된 유리문의 손잡이를 밀고 들어 서자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넓은 로비가 정면에 보였다. 왼쪽에서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나이 든 남자 직원이 다가와 용건을 물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예약증을 꺼내어 주자 그가 안경을 꺼내어 쓰더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상냥한 표정으로 변한 그 나이 든 남자가 젊은 급사에게 손짓으로 내가 끌고 있던 캐리어를 맡게 했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간 숙소는 전망이 꽤나 괜찮아 보였다. 에브로 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강변 너머로는 도심의 모습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비에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캐리어를 열어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 숙소를 빠져나오자 빗줄기가 다소 주춤했다.
천천히 걸음을 에브로 강변으로 향했다. 한니발이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들어와 이곳 사라고사를 가로지르는 에브로 강을 건너면서 알프스 산맥으로 한발 더 다가간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나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한니발과 그의 코끼리 부대가 강을 건너고 있는 당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다리 건너편에 '필라르 성모 대성당'의 웅장한 위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유명한 그 야고보가 성모 마리아를 알현하고 성모가 전해 준 기둥으로 성당을 세웠다는 바로 그 대성당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성당의 돔을 뚫고 떨어진 2개의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 하여 이 또한 '성모의 기적'이라 하지 않았나? 천장에는 이 곳이 고향인 화가 '고야'의 천장화가 여기저기 보존되어 있었다.
강변에서 성모 대성당을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들어 서자 각양각색의 현란한 벽화들이 여기저기 벽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색창연할 것 같은 이 도시에도 피가 뜨거운 젊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곳곳에 묻어 있음을 생각했다.
사라고사는 로마제국 당시 히스파니아로 불리던 변방 도시였는데 '카이사르 아우구스타'라는 지명을 아랍인이 진출하여 '사라구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사라고사라는 지명으로 굳어졌고 중세 아라곤 왕국의 주도였다고 했다.
필라르 대성당으로 이어진 긴 직선의 도로를 따라 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니 의외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고 드문 드문 한국인들이 주고받는 대화도 귀에 들어왔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천둥이 치고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은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앞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우산을 쓰지 않았지만 건물과 건물로 이어진 지붕이 비를 막아 주었다. 전차 정거장 앞에 불이 환하게 켜진 한 터키 식당을 찾았다. 이스탄불에서 와서 3년째 식당을 하고 있다는 여주인이 반갑게 웃으며 맞아 주었고 배달을 하는 남자는 모로코 사람이라 하여 아랍어 몇 마디를 서로 주고받았다. 간단한 아침 거리를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준비해 주었다. 계속 몇 차례 눈이 마주쳤는데 검은색에 가까운 컬이 진 머리카락에 스페인과 아랍 여자의 외모가 묘하게 뒤 섞인 여자였다. 갈색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아침 준비를 해 주는 그녀의 친절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복도식으로 이어진 천장이 있는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해 지기 전에 마드리드에 들어가려면 너무 늦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사라고사 버스 터미널에서 간단한 음료수를 구입하고 시간에 맞추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차장이 간단한 표검사를 했다. 안전벨트를 메라는 안내방송이 끝나고 차가 천천히 터미널을 빠져나와 마드리드로 향했다. 마드리드 가는 길 내내 비가 내렸다.
나는 '레인 메이커'... 마드리드에서도 여지없이 빗길을 이리저리 걸을 것이다.
당신의 도시에 느닷없는 비가 내린다면 그 도시 후미진 골목의 어딘가에 내가 방문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