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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

As time goes by

by 오스만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대학교 신입생 때 들었던 수업 중에 '한국사의 이해'라는 교양 필수 과목이 있었는데 담당 교수님이 경남 밀양 분이셨다. 억양에 경상도 사투리가 잔뜩 섞여 있던 그분은 수업 첫날에 과제를 하나 내어 주셨는데 국립 중앙 박물관을 방문해서 그곳에 전시된 유물들과 대화의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일견 생소한 과제였지만 덕분에 수업을 같이 듣던 과 동기들 몇몇과 그곳을 방문해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와 있던 감색 교복 차려입은 여학생들 구경은 실컷 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분이 국민학교는 일제의 잔재이므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어야 하며 그 일에 본인이 앞장서고 있다고 수업시간에 이야기하셨을 때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내게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나? 하지만 나중에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결국 그 이름이 바뀌었고 그 교수님은 어떤 연유에 선지 간첩죄로 복역을 하셨다는 후일담을 들은 것 같다. 물론 후일 사면 복권되셨다는 이야기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고려사 관련해서 국내에서 아주 권위를 가지고 계셨던 분인데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그 아이가 건넨 손목시계를 처음 본 것이 아마 국민학교 5학년 즈음이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게 국민학교 생활 6년 동안 전학을 다섯 번이나 했던 터라 온전히 당시 급우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기 힘든 탓도 있지만 4학년과 5학년 생활은 같은 아이들과 2년 가까이 한 반으로 지냈기에 그나마 생각나는 일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큰 키에 평소 말이 별로 없었지만 제법 공부를 잘했고 미술과 체육 과목 활동도 눈에 띄는 아이였다. 속칭 재능이 많은 아이 같았다. 표정이 늘 밝았고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묻는 질문에 답변도 척척 해대는 것이 매사 소극적이었던 나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그 애가 처음부터 같은 반이었는지 아니면 중간에 어느 학교에선가 전학을 왔는지 명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5학년 봄이 지나고 학교에서 반공을 주제로 한 포스터 대회를 공지했을 때 같은 반에서 내가 그린 것과 그 아이가 그린 포스터 2점이 대회에 제출된 것을 계기로 그나마 서로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오고 갔던 것 같다. 같은 반이라고는 하지만 한 반에 70여 명 가까이 되는 애들이 수업을 같이 들었던 터라 한 학년이 지나도 얼굴과 이름 정도만 겨우 알 뿐 얘기를 몇 번 나눠보지 못한 경우가 흔한 시절이었다.


그 아이는 포스터의 배경에 당시 국민학교 5학년생이 생각하기 힘든 '그러데이션'을 아주 근사하게 표현했는데 당시의 나는 그걸 무척이나 신기하게 여겼고 그렇게 표현하는 방법을 물었던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난 후 그 아이가 스펀지에 여러 가지 물감을 차례로 묻혀 그러데이션 시범을 보여 주었을 때는 아주 대단한 장인이 보여 주는 어떤 시범을 눈 앞에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날 이후 나는 그 아이와 수업시간에 쪽지 같은걸 몰래 적어 함께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나고 그 아이가 불쑥 제안한 생일 초대를 받아 예정에 없이 그 아이의 집을 혼자서 방문했는데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층 집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서 널찍한 응접실을 지나고 나무 계단 위로 안내된 그 아이의 방은 아주 근사해 보였다. 게다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던 여러 가지 생일 음식들과 2단으로 포개진 생일 케이크는 아주 세련되게 차려졌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아이의 이름이 '안대민'이었을 듯한데 왜 유독 생일날 나만 그 아이의 초대를 받았는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길이 없지만 그 아이와 함께 했던 그 날의 몇 시간은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11살 나이의 내가 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각별한 기억을 남겼다.


특히 책장 가득히 빼곡하게 잘 정돈되어 있던 '새 소년 클로버 문고'나 '소년. 소녀 세계 문학전집' 그리고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같은 각종 문고판 책들과 당시 나의 로망이었던 '동아 학생 백과사전' 전질 그리고 장식장 하나를 온전히 따로 차지하고 있던 아카데미, 알파 과학사의 각종 프라모델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던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고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도라에몽'이라는 만화를 '동짜몽'으로 이름 바꾸어 막 번역해 놓았던 만화책들도 좀처럼 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그 아이는 책상 서랍 속에서 리본 장식으로 포장되어 있던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어 말없이 내게 내밀었다. 빙긋이 웃으며 상자를 열어 보라고 했다. 머뭇거리던 내가 포장지를 풀고 호기심에 가득 차 상자를 열자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자기 집을 처음 방문한 친구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거라며 방문 기념으로 내게 가지라고 했다. 생일 선물을 미처 준비 못했던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아이가 싱긋이 웃고만 있었다.


난생처음 손목 위에 시계를 차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학교에 갈 때에 착용을 하지는 않았고 평소 사용하지 않던 양철로 된 필통 속에 남몰래 시계를 넣어 두고 한 번씩 꺼내어 보는 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엄마에게 조차 시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비밀로 했다. 필통을 열어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귀에 바싹대고 한 번씩 듣는 일이 마치 경건한 비밀의식을 치르는 기분으로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시계에서 전해지는 채칵거리는 소리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심장소리를 엿듣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생일날 이후 어쩐 일인지 그 아이와 나는 조금 데면데면해져 있었고 한 번씩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그 아이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게 윙크를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을 통해 그 아이가 독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반 아이들과 함께 전해 들었고 그 아이가 떠나고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난 후엔 나 또한 학교를 다시 옮겨야만 했다. 한편 전지가 다 된 것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시계의 초침이 더 이상 꼼짝하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엔 양철 필통 속에 숨겨 온 그 손목시계도 어느 날 훌쩍 떠나 간 그 아이처럼 내 관심 속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아주 나중에 일이지만 리비아 벵가지 '자말 압둘 나세르' 거리를 걷다 무심코 들여다본 시계점 쇼윈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스와치' 시계를 본 이후 내게는 손목시계에 대한 묘한 관심이 생겼고 '기계식 무브먼트'니 '쿼츠 무브먼트'니 하는 용어도 굳이 알아서 찾아보게 되었다. 값비싼 시계들은 집 한 채 값을 가볍게 훌쩍 넘어선다는 것과 내가 알고 있던 '롤렉스'나 '오메가' 같은 시계들이 시계의 족보에서는 말석에 있다는 사실도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는 스마트 시계라고 하여 모바일 폰과 무선으로 연동되는 손목시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시계 페이스를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정식 수입품을 구할 수 없어 미국으로 가는 지인 편에 부탁해 하나를 구입했는데 처음 얼마간은 여러 회사의 페이스로 바꾸어 보는 재미가 물론 있었지만 결국 그건 어른들의 장난감이란 걸 깨달았다. 시계의 생명이랄까. 아니면 시계를 시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기능적인 면으로 본다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물건임을 인정하지만 시계라는 어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지금 변함이 없다. 모바일폰을 우리가 시계라 부르지 않듯이.


지금 이슬람권은 대 바이람이라 하여 '희생제' 연휴가 한창이다. 아브라함의 큰 아들이자 아랍인들의 직계 선조가 되는 '이스마일'이 하나님의 시험에 따라 번제물에서 벗어난 일을 축하하는 기념일이고 이슬람 최대 명절이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북적대던 거리가 텅텅 비어 있다. 한 달여 전 인터넷 쇼핑몰에서 3만 원이 조금 넘는 손목시계 하나를 주문해서 지금 잘 차고 있다. 자기 전에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시계를 귓가에 바싹 가까이 대면 시계에서 나는 채깍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마치 살아 있는 시간이 들려주는 그 심장 박동 소리를 몰래 엿듣는 듯하다.



너무 머뭇 거리지 말라고. 시간이 언제나 너의 편은 아니라고. 한 번 지나간 시계의 초침 소리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고 어둠 속에서 새로 산 그 손목시계가 지금 내게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왜 그 아이가 선물했던 그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지 않았던가? 손목시계의 용도는 손목 위에 있는 것이라고. 손목에 차지 않는 시계는 이미 그 가치를 잃은 것이라고. 그 아이가 내게 보여 주었던 오래전 '윙크'가 오늘 내 잠 속에서 어렴풋이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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