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가을이 너무 익어 막 터질 지경이었지. 은행잎으로 노오랗게 덮인 진입로는 도로와 사람 다니는 길의 구분을 예전에 잊어버렸어. 용문산의 빛깔은 술 잔뜩 취한 사내의 얼굴인 양 온통 붉은색 일색이었고.
어느 해였더라? 그 해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지. 청량리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무작정 내린 경기도 용문역에서 또 버스를 타고 우리가 용문산을 찾았던 그 해가 말이야.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한 해 전이니 1989년 가을의 끝자락이었을 거야. 너는 기억하니? 그 날 하늘색 원피스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너는 입고 있었지. 항상 느끼던 생각이었지만 그 날따라 너는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어.
용문산 입구를 따라 쭉 늘어서 있던 그 가게들의 긴 행렬도 기억이 나네. 건강식품을 팔던 어느 진열대에서 뱀 술이 들어 있던 병들을 보고 너는 기겁을 했었지. 너무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다가 기절할 뻔했단다. 용문사까지 가는 비탈진 산길을 치마에 구두를 신은 채 너는 씩씩하게 걷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용문산 입구에 도착해서는 발을 절뚝이며 그 천년 되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내게 애꿎은 투정을 부렸었어. 너무 오래전 일이라 넌 기억 못 하겠구나.
일요일이라 용문사 경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대웅전에서 네가 '백팔 배'를 하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했다가 내려오는 길에 서로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화제로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오던 물소리와 산에 사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그 한나절을 보냈던 가을날의 청명함이 아직도 나는 생각나는구나.
해마다 계절은 바뀌는 것이지만 가을이면 유독 너와 함께 했던 일들이 자꾸 생각나곤 해. 대학로 그 찻집은 기억나니? 3층에서 우리 자주 만나곤 했었지. 내가 조금 늦기라도 하는 날이면 넌 항상 새침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곤 했었어.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넌 잘 모를 테지만 그 모습을 기대하고 내가 먼저 온 날이면 몰래 숨어 너의 표정을 훔쳐본 적도 많았지. 어쩌면 넌 알고도 나를 위해 속아준 건 아닌지. 너 참 생각이 깊고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지. 누나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항상 나를 향했던 너의 웃음은 또 얼마나 상큼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다시 한번 그 시절 너의 그 어여뻤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으로 말이야.
이듬해 4월. 벚꽃이 비처럼 떨어지던 날 밤 너와 크게 한 번 다투고 그 여름이 끝나갈 때까지 우린 연락 없이 지냈지. 그리고 입대 영장을 받아 정성껏 말린 장미꽃 잎들을 동봉해 네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답장을 훈련소에서 받았어. 누나가 훈련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네 편지를 함께 동봉했더구나. 너는 기차를 타고 춘천에 다녀왔다고 했었고 철길 옆으로 '코스모스의 향연'이 펼쳐져 있더라고 했지. 난 중대 막사 앞 배수로 측백나무 사이에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엉엉 울었단다. 함께 전투화를 닦으러 나왔던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을 만큼. 네 목소리 한 번 듣고 오지 못한 것이 너무 서럽게 느껴지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군입대한다고 그때 편지에 쓸 걸 그랬나 봐. 에고...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가 되었어. 생각해 보니 그건 너의 첫 편지이기도 하구나. 그렇지. 유독 너는 편지를 잘 쓰지 않았으니. 나중에 코스모스의 꽃말을 찾아보니 '소녀의 순정'이라고 하던데 나와 너의 그 기억들이,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간들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였고, 헤어짐의 시간이 두려웠던 그 시절 우리는 과연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친구들과 함께 떠난 초가을 날의 춘천여행 도중에 철길 가득 줄 지어 선 코스모스의 향연을 바라보게 되었어요.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당신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기 위해 늦은 밤 앉아 있어요. 참. 이상한 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