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세상의 황제와 만나다
한동안 조용했던 ‘빌라 요비스’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티베리우스의 극심한 신경증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AD 30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사후 제 2대 로마 황제 자리를 승계하여 제정 로마 제국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후 재위 10여 년 만에 불현듯 수도인 로마를 떠나 와 이탈리아 반도 남부 ‘카프리 섬’으로 자신의 근거지를 옮긴 황제 티베리우스는 나폴리 남쪽의 카프리 섬에 홀로 은거하며 로마를 지키고 있던 원로원과 제국의 속주에 배속되어 있던 황제의 휘하 군단들로부터 황제가 받게 되는 충성을 확고하게 다짐받고 있었다.
4년 전 자신의 거취를 카프리 섬으로 옮기겠다고 원로원에 처음 통보했던 황제의 돌발행동에 무척 당황했던 원로원의 의원들은 새로 황제에 대한 충성결의를 맹세하는 등 그의 마음을 에둘러 돌려보려고 하였으나 황제 티베리우스는 요지부동으로 그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수년 전부터 나폴리 남쪽의 섬 카프리에 그가 머물 철통 같은 요새 ‘요비스’와 물을 공급해 줄 저수조를 은밀하게 완성시켜놓았음을 원로원에 통보했다.
원로원을 대표하는 몇몇 의원들이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통하여 황제가 의도하는 속마음을 알아 보고자 하였으나 세야누스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태도로 원로원의 의원들을 더욱 긴장시켰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변방에 산재한 각 군단의 지휘관들로부터 충성의 회신을 무표정하게 받아들인 직후 훌쩍 이 곳 카프리 섬으로 그의 거취를 옮겨 버렸다.
가뜩이나 그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든 티베리우스 황제가 카프리 섬으로 떠나고 나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원로원의 의원들은 수도 로마에 남은 황제의 근위대장이자 정책 대변인 세야누스에게 삼삼오오 몰려들어 온갖 호들갑을 떨며 황제에 대한 칭송과 충성심을 경쟁하는 식으로 그들의 하루하루 직분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요새와도 같은 황제의 거주지 ‘빌라 요비스’에 은거하며 로마제국의 중심부인 로마는 물론 히스파니아(스페인 지역)와 갈리아(프랑스 지역), 게르마니아(독일 지역) 그리고 유대(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집트, 수리아(시리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시콜콜한 갖가지 소문조차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황제의 뛰어난 정보망은 실제로 촘촘하게 조직되어 있어 그 지역에 파견된 총독과 군단의 지휘관들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고 행여 잘못된 정보가 황제에게 보고 되거나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보고가 자못 지체 되었을 경우 그 당사자는 이곳 빌라 요비스로 호출되어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절벽인'티베리우스의 도약대'에서 스스로 뛰어내려야 하는 황제의 처분을 받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급작스런 신경증이 재발하자 빌라 요비스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경비대장 실라누스와 황제의 시종장 세바스티무스가 황급하게 황제의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하나 말은 없었지만 둘 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평소 말 수가 거의 없는 황제였지만 그가 한 번 역정을 내기 시작하면 그 어느 누구도 선뜻 그의 그러한 행동을 달래 줄 수가 없었고 혹 주변에서 사소한 실수라도 있는 날이면 크고 작은 사단이 항상 벌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내실로 급하게 들어서는 실라누스와 세바스티무스를 힐끗 쳐다보던 황제가 그들을 힐난하듯 소리를 질렀다.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보낸 나의 명령은 왜 아직도 이행이 되지 않고 있는가?"
경비대장 실라누스가 곁눈질로 시종장인 세바스티무스를 사뭇 노려 보자 긴장된 표정을 한 세바스티무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카이사르의 엄중한 명령이 필라투스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지금 이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페니키아 지방의 티르에서 그를 태운 배가 알렉산드로스를 거쳐 키레네의 아폴로니아에 현재 정박 중입니다. 삼일 안에 그는 반드시 이곳으로 도착을 할 것입니다."
"늦어. 너무 늦어......"
황제가 중얼거리며 내실의 열린 창을 통해 코발트 빛 지중해를 연신 내려다보았다. 나이 육십이 훌쩍 넘어 이미 희끗하게 세어버린 그의 백발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불쌍한 빕사니아. 빕사니아...... "
그 소리는 낮은 탄식과 흐느낌으로 이내 이어졌다.
"이대로 그 아이마저 당신 곁으로 보낼 수는 없어...... 흐흐흐……"
황제가 돌아보지 않고 손짓을 하자 그제야 안도한 표정의 실라누스와 세바스티무스는 소리 없이 황제의 내실을 빠져나왔다.
3일이 지난 후,
수리아 총독이 보낸 관할 군단의 젊은 장교 두 명이 한 사내와 함께 카프리 섬의 가파른 언덕을 막 오르고 있었다. 젊은 장정이 한 시간을 간신히 올라야 도착하는 길이었지만 쉬지 않고 오르는 모습이 몹시 서두르는 듯 보였다. 계속되는 검문에 시간이 더 지체되었지만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수리아 군단의 젊은 장교 두 명은 빌라 요비스에 도착하자마자 경비대장 실라누스를 찾아가 짧은 보고를 마쳤다. 그리고는 보고가 끝난 직후 그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 달아나듯이 두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실라누스가 세바스티무스와 함께 낯 선 사내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내실로 안내했다. 황제 앞에 선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황제는 로마 원로원에 보내려던 편지를 쓰다가 말고 내실에 들어 선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다시 손짓을 하여 실라누스와 세바스티무스를 물러 나가게 했다.
황제와 사내만이 적막한 그 방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대가 갈릴리에서 온 사람인가?"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사내의 곁으로 나지막이 허리를 굽히며 다가서며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사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두 눈만큼은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
사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필라투스의 보고를 통해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필라투스가 엉뚱한 사람을 내게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하는가?
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숨기지 못하는 법이지."
사내의 행색을 찬찬히 훑어보던 황제의 말이 이어 지자 사내가 황제를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상대방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듯 보였다.
"당신이 바로 ‘카이사르’군요. 내가 카이사르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닌데 나를 이렇듯 부른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오? 나는 카이사르의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이 아니오."
사내의 말에 잠깐 생각을 하는 듯 보였던 황제가 물었다.
"자네는 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군. 황제가 된 이래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지. 내가 자네를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는데도 나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텐가?"
"사람이 태어나고 그 목숨을 다 함은 한분이신 하나님의 계획일 뿐이니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뿐이오."
사내의 대답에 황제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을 발했다.
"유대의 신에 대해 전에 들은 적이 있지. 유대인들은 그대들의 신 이외에는 전혀 섬기지를 않는다고 하더군. 내가 듣기로 자네는 그 유대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지?"
황제가 묻자 사내의 눈이 한층 더 반짝거렸다.
"내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시오. 그분은 천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며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오."
사내의 확신에 찬 말에 황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늘나라. 하늘나라라...... 그래 하늘나라가 대체 무엇인가?"
"하늘나라는 고기 잡는 사람이 고깃배 가득 물고기를 잡아 가족들에게 돌아갈 때 느끼는 행복한 마음 안에 있고 또 밭을 가꾸는 농부가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밭을 일구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내일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이요."
황제의 물음에 사내의 대답이 막힘 없이 이어지자 황제는 내실의 열린 창으로 천천히 걸어 가 지중해의 수평선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황제였다.
"그대는 한 여자를 그대의 마음속에 깊이 품어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의 아들이 좋아하는 한 여자를 마음에 두는 일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오. 어찌 없었다 할 수 있겠소?"
사내의 대답에 황제의 마음 한 구석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빕사니아! 내 마음속의 여자인 그녀를 잃고 난 이후 나는 세상살이의 의미를 모두 잃고 말았다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을 온전히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동무이자 아내였었지. 10년 전 그녀의 죽음 앞에서 난 황제라는 이 세상의 옷이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네. 그래서 그날 이후 줄곧 이 곳 카프리 섬으로의 도피를 이미 마음먹었는지도 몰라. 내 주변이 온통 음모와 아첨으로 가득한 시절이었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황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와 빕사니아 사이에는 아들 드루수스 말고도 알려지지 않은 딸이 하나 있었네. 제 어미를 쏙 빼어 닮아 내 남은 생의 기쁨이자 희망이 되어 주었던 아이인데 그 어미의 이름을 따서 ‘빕사니아’라고 이름 지었다네. 그 아이가...... 그 아이가..."
황제의 목소리가 깊은 슬픔으로 메었다. 감정으로 흐느끼는 그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간 세계의 살아있는 신이 흐느끼는 순간 사내는 고개를 바로 들어 늙어가는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십 년 전 그 아이의 어미를 죽음 앞에 떠나보내고 난 이후 나는 황제조차 할 수 없는 일. 사랑하는 단 한 명의 내 여자마저 죽음 앞에서 지켜내지 못했다는 그 자괴감에 무척 괴로워했다네. 난 단지 걸어 다니는 땅 위의 한 인간일 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네. 그런데...... 이제 빕사니아와 나의 딸 그 아이가 또 다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그 아이마저 잃고 만다면 난 도저히 얼굴을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을 거야. 맹세컨대 세상의 모든 신들을 저주하겠네. 백방으로 제국을 통틀어 유명하다는 의원들을 모두 수배하여 딸아이를 지켜내고 싶었지만 결국 허사였네. 저 히스파니아의 땅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방의 땅까지...... 구석구석을 말이네. 심지어 페르시아의 신비한 의술마저도 무용지물이더군. 내 딸아이가 다시금 그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황제의 자리는 물론 내 영혼마저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묵묵히 황제의 울먹임을 듣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황제가 그의 거칠고 투박한 두 손을 꼭 쥐었다.
"유대 땅의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네. 파견된 제국의 행정관뿐 아니라 유대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들도 내게 정보를 전했지. 그대가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귀먹은 자를 다시 듣게 하고 앉은뱅이와 손 마른 자를 고치고 문둥병을 고치며 마귀 들린 자로부터 그를 해방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무덤으로 부터도 살려 내었다는 그 소문들이 모두 사실이었나? 자네가 무슨 권능으로 그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네. 다만 그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딸 빕사니아를 죽음으로부터 막아 주게. 어미의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불쌍한 아이일세......"
황제의 흐느끼는 듯한 간청을 듣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당신이 얘기하는 나에 대한 모든 소문이 다 사실이라면 그 권능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은 내가 능히 당신의 딸을 죽음에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사내의 손을 꼭 잡은 황제의 손목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어린 새끼를 지켜 내고자 하는 아비의 본능이었다.
"자네의 권능이 어디에서 오던지 내 딸아이가 자리에서 일어 나 준다면 내 주저 없이 그 권능을 주시는 분을 섬길 것이네. 황제의 이름을 다 걸고 내 맹세하지."
"당신의 딸은 다시 일어설 것이오. 오늘 저녁달이 뜨기 전에 당신은 당신 딸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세 번 보게 될 것이오. 다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신이 카이사르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일이 내 아버지의 일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리고 오늘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나에게 부른 것이란 걸 함께 기억하시오. 영원할 것 같은 당신의 나라도 결국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흩어질 날이 올 것인데 나는 그 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하나님의 나라 즉, 하늘나라로 내 백성들을 이끌 것이오. 나는 이만 내 땅으로 돌아가 내 아버지가 뜻하는 일을 이루고자 할 것이니 당신은 그만 당신의 일을 하시오. 지금 당신이 내게 하는 모든 맹세들이 바위 위에서가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아서 그 열매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 맺을 수 있기를 바라오."
사내의 말이 끝나고 황제가 시종장 세바스티무스를 부르기 위해 내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잠깐 사이에 황제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 방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바스티무스가 황제의 명을 받아 어린 빕사니아의 손을 잡고 황제의 내실을 찾았을 때 창밖을 향해 꿈꾸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황제는 빕사니아의 환한 웃음과 밝은 목소리를 듣고는 그녀의 목을 껴안으며 오열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빕사니아는 늙은 아버지를 따라 참았던 울음을 마침내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