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의 대하여」를 읽고 사회복지를 생각하다
「개소리에 대하여(원제: On Bullshit)」라는 책이 있다. 제목이 좀 유별나서 그렇지 사실 이 책은 TV 프로그램에 소개가 될 정도로 꽤 유명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1929-2023)는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로 현대사회에서 저명한 도덕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프랭크퍼트가 1986년 예일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개소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후 20년이 지나 2005년이 돼서야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이다. 책이 발간되자마자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27주간이나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책이 발간되고 난 후 또 20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책을 알게 된 셈이다. 늦은 소문을 듣고 나는 제목에만 이끌려 부랴부랴 책을 사러 서점에 갔었다. 그런데 철학코너에서 한참을 책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점원에게 책을 좀 찾아달라며 책제목을 말하니까 점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런 책도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민망함을 무릎 쓰고 사정한 책이 그나마 있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제주도에는 서점하나 변변치 않다 보니 차를 타고 여러 군데를 수소문한 끝에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책을 받아들고는 나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황당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책의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다가 내용도 70페이지가 넘지 않아서 (아까 그 점원처럼) 나도 이런 것도 책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덕망이 높은 도덕철학자가 개소리를 주제로 책을 쓴 데는 분명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우리말 ‘개소리’에 대하여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개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개소리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지각은 갖추고 있다고 꽤 자만하고 있다.(p.7) - 책의 첫문장
책을 펼치자마자 저자는 시작부터 개소리가 만연한 현실 사회를 너무나도 통렬하게 꼬집는다. 여기서 나는 눈길을 끄는 대목이 개소리가 만연한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데 있다. 나 또한 인터넷에서 정치관련 기사에 달린 말 같지도 않은 편향적인 댓글들을 보면서 ‘무슨 이런 개소리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 적이 많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일 뿐이고, 그냥 별난 사람인냥 취급하면서 무심코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절대 개소리 따위는 말하지도 현혹되지도 않으리라고 꽤 자신만만하면서 살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개소리가 이토록 만연한데 나는 한 번도 개소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말 앞에 ‘개-’를 붙이면 흔히 부정적이고 천한 의미로 쓰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개소리도 마찬가지로 ‘말 같지 않은 소리’나 ‘질이 떨어지는 천한 말’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욕할 때 쓰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싶었지 구태여 의미를 따져가며 쓸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소리’를 딱히 뭐라고 정확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우리말 ‘개소리’에 대해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On Bullshit’이다. 영어 ‘bullshit’을 검색해보면 우리말로 ‘헛소리’, ‘터무니없는 말’ 정도로 해석이 되는데, ‘bullshit’은 원래 ‘bull’과 ‘shit’의 합성어다. ‘bull’은 ‘황소’라는 의미도 되지만, ‘더운 공기(hot air, 입김)’라는 의미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말, 즉 헛소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shit’은 ‘똥’이라는 의미인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외국 사람들이 평소에 자주 쓰는 욕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입김과 똥은 유사성이 있다. 어떤 사람의 말이 단지 입김에 불과하다는 것은 대화에서 실체도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똥은 원래 우리가 먹은 음식에서 영양가 있는 모든 게 제거되고 버려지는 물질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등장하는 ‘bullshit’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말하는 언어라기보다는 그저 입으로 똥을 싸지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썼다.(p.44-46 요약)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의 제목을 “헛소리에 대하여”가 아니라 “개소리에 대하여”로 번역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헛소리는 왠지 제정신이 아닐 때 실수로 하는 말 같지만, 개소리는 멀쩡한 정신에 남을 기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는 말 같기 때문이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개소리’의 의미를 굳이 알고 나니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런 개소리가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씁쓸해진다.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삶이 고통인 이유가 어쩌면 이러한 개소리가 난무하는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개소리의 발화자(?)로 지목되는 사람들이 보통 정치인들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분들의 입김에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은 바로 사회복지다. 정치인들은 사회복지를 마치 숨을 쉬듯 너무 쉽게 내뱉는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대표자니까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사회복지 정책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그 말에 알맹이가 없고, 본래 목적이 시민들의 복지증진이 아니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분들이 말하는 사회복지가 진정 시민을 위한 복지인지, 아니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표를 얻으려고 내뱉는 셀프(?)복지인지 따져보면 그것이 사회복지인지 개소리인지 분간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개소리와 거짓말의 차이
인간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말들이 존재한다. 참말과 거짓말, 농담과 진담, 헛소리, 잡소리, 그리고 개소리 등등 살면서 듣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개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프랭크퍼트는 책에서 개소리를 거짓말과 비교해 가면서 개소리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는지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는 자기들이 마치 진리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거짓되게 연출한다. 이들 각각의 성공은 그것에 대해 우리를 기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허위라고 간주하는 어떤 것을 우리가 믿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반면에 개소리쟁이가 자신에 관해 숨기는 것은, 자기 말이 맞든 틀리든 그 진릿값에는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략) 누군가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반응한다. 그리고 그는 그만큼 진리를 존중하는 셈이다. (중략) 그렇지만 개소리쟁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효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p.56-64 요약)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와 거짓말의 가장 큰 차이점을 진실(진리)을 기만하는 데 있다고 본다. 거짓말쟁이는 진실(또는 사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야 아는 진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거짓말쟁이는 성실하기까지 해야 한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키지 않으려면 잔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개소리쟁이는 진실이 무엇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원래부터 진실에 무관심 하기 때문에 굳이 공을 들여 말할 필요가 없다. 개소리는 진실을 말하려거나 거짓을 말하려는 의도조차 없고 그저 진실인 척 허세를 부리는 것에 가깝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에 무관심한 개소리라는 말이다.
사회복지가 개소리가 될 때
지금껏 나는 (주제넘지만) 사회복지에도 진리(―철학이라고 해두자―)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현실에서 당연히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도 나름 사회복지를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공부하고 또 오랫동안 실천해 오고 있지만 적어도 책에서 배웠던 사회복지와 지금의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은 확실하다. 언행일치도 안 되는 마당에 산학(産學)일치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쨋든 주변 사회복지사 중에는 나처럼 대학원까지 나와 석・박사를 졸업하신 분들이 참 많다. 이분들 대부분은 오롯이 사회복지의 진리를 갈망(?)해서 비싼 등록금을 내가면서 대학원을 다녔으리라 믿고 싶지만, 그토록 지식수준이 높은 수많은 사회복지사들이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데도 사회복지의 모습이 이처럼 초라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본다.
개소리는 꼭 허위일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은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내용에 있어 거짓말과 다르다. 개소리쟁이는 사실 또는 그가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심지어 기만할 의도가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p.56)
(굳이 연결 짓고 싶지는 않지만) 위에서 언급한 프랭크퍼트의 말에서 개소리를 사회복지로 단어만 바꿔보면 의외로 앞뒤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사회복지를 부정확하게 또는 잘못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이 허위거나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바탕으로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를 기만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프랭크퍼트의 말처럼 사회복지가 우리를 기만하게 되는 경우는 실천 이전에 기획의도(또는 동기)에 있다. 사회복지는 실천의 결과물은 같더라도 기획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개소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자원봉사활동의 목적이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또는 표를 얻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던가, 기부나 후원의 목적이 재고소진이나 탈세의 의도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애초부터 사회복지사가 기획의도가 다분하였다면, 그것은 사회복지가 아니라 개소리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개소리가 위험한 이유
사회복지가 개소리로 너무나 쉽게 치환되는 현실은 사회복지사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복지와 개소리의 대응이 그만큼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둘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가 된다. 앞에서 예로 든 사례들은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너무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사회복지가 개소리가 될 위험성(?)을 안고서라도 그러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벌인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장려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왜일까?
사실 사람들은 거짓말보다는 개소리에 대해 좀 더 관용적인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소리를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덜하기 때문이다. (중략) 거짓말은 종종 모욕감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p.52)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한 또 다른 이유를 사람들이 거짓말보다 개소리에 대해 좀 더 관용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다 들통나면 사회적으로 커다란 비난이 쏟아지고 수치심을 느끼겠지만,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면서 외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개소리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금방 잊고 만다. 자칫 상대방의 개소리에 대해 정색하고 비난을 하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죽자고 달려든다며 오히려 역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말에 비해 개소리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을 이용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포토라인에 선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프랭크퍼트는 진실에 위협적이고 사람들이 결과에 무책임한 경향을 이용하기까지 하는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더욱 음흉하고 사회를 서서히 함정에 빠트리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회복지의 진리가 어떻고, 기획의도가 어떤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회복지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면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봉사점수까지 따면 좋지 멀그래?”, “어차피 버릴 건데 좋은 곳에 쓰면 좋자나?”라고 말한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기획의도(동기)를 놓고 보면 그건 일석이조가 아니라 조삼모사(朝三暮四)다. 그리고 조삼모사는 말 그대로 개소리일 뿐이다.
진정성 있는 사회복지는 개소리?!
프랭크퍼트는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에 원천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회의주의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기 위한 노력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린다. 프랭크퍼트는 회의주의를 개소리의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그 이유를 ‘정확성(correctness)을 요구하는 규율’에서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요구되는 규율’로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정확성, correctness)하는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실재에는 사물에 대한 진리로 간주할 만한 본래적 속성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진정성, sincerity)하려는데 전념했다. 이것은 마치 사실(진실)에 충실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그 대신 개인들은 자신에 대해 충실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p.67)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성’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것을 주장할 때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호소한다. ‘나의 진심’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아니면 개소리든지 ‘나의 진심(진정성)’을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진정성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일 뿐이지 실체에 대한 객관성을 보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회복지 일도 정확성보다는 진정성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매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일을 반복하고, 성과라는 것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식이라 이 일을 하면 할수록 회의주의의 수렁에 점점 빠지게 된다. 사회복지사의 일상이 이렇다보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복지 실체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지고, 자기합리화를 위해서(또는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사회복지사 스스로 진정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회복지사들은 지금의 사회복지가 정확하진 않더라도 나름 진정성은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건 개소리쟁이들의 특성과 똑같다. 프랭크퍼트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라고.
사회복지가 슬프게도 개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사회복지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걸까? 과학은 몰가치적이고 객관적이지만 사회복지는 가치중심적이고 주관적이다.(https://brunch.co.kr/@songjanghee/67 참조) 그래서 어쩌면 사회복지는 정확성보다는 진정성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회복지가 사회복지사 개인의 주관적 가치(진정성)에 따라 개소리가 될 수도 있는 운명이라면 나는 사회복지가 추구하는 '객관적 가치'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그게 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실천하기 전에 먼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실천인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사회복지사 1급 개소리쟁이가 씀... 알쓸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