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8의 기록
#1
무계획 휴가 둘째날. 가끔 가는 일산의 해장국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온갖 내장과 선지가 듬뿍 들어있는 칼칼한 양평해장국이다. 이런 해장국을 먹기 시작한 건, 불과 지난해부터다. 그전까진 징그러워서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젠 먹을 수 있게 됐다. 아니 굳이 찾아서 먹게 됐다.
먹는내내, 한그릇의 맛있는 음식이 주는 위안과 행복에 대해 감사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참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그러나 그만큼 새로 얻게 되는 것들도 많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는 만큼, 할 수 있는 것들도 늘어간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심지어 노화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2
계획 없이 시작된 휴가지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게 있다. '죽은 책장 프로젝트'다. 책 욕심, 정확하게는 책을 '사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때때로 서점에 들러 한두권씩 사모은 책이 족히 200권이 넘어가는 것 같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많다. 그런데 욕심은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행위에서 멈춰버린다. 애초에 살때부터 당장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을 산게 아니라, '이 책 정도면 죽기전에는 읽겠지? 아니 읽어야만 하겠지? 그러니까 사도 돈은 안아깝겠지? 혹시 안읽고 죽어도, 그만큼 가치있어 보이는 책이니까 내 남은 가족이 당근에 올리면 그래도 팔리긴 하겠지?'와 같은 계산으로 책을 사왔다. 그러니 읽을리가 없지. 다 떠나서, 독서 자체를 안한지가 너무 오래됐다.
그러니 책장은 말그대로 죽어있었다. 사다모은 책의 98%가 한번 들춰보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책장 왼쪽 맨위부터 오른쪽 아래로, 억지로 읽어 나가기로 했다. 한방향으로만 읽으면 카테고리가 좀 겹칠테니, 반대방향으로도 좀 섞어가면서. 관건은 얼마나 오래 프로젝트가 지속될까가 아니다. 과연 이번 생 안에 이 프로젝트를 끝낼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다.
#3
프로젝트 규칙에 따라 처음 선택된 책이 하필 서양 철학사에 대한 책이다. 두껍고 큰 책들을 위쪽에 몰아둬서 일어난 비극이다.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다. 무거워서 손으로 들고 읽기도 힘든데,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는 내용도 아니라 하는수 없이 구석에 쳐박아 둔 독서대를 꺼내야만 했다.
대략 6분의 1정도 읽었는데 아직 기원전 500~600년 정도. 플라톤도 본격 등장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시작인줄 알았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느낀점. 기나긴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사유의 확장이 이뤄져 왔지만, 나의 사고 수준은 2500년전의 몇몇이 도달했던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구나. 뭐 다행히도 어둠을 밝히고 미지의 세계를 헤쳐나가며 지식과 사유를 확장시키는데에는 2500년이 걸렸을지 모르지만, 그 2500년의 여정을 잘 정리된 텍스트와 자료들로, 아주 얕게, 극히 대강 이해만 하는 것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벼운 마음으로 되는데까지만 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