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혜경궁 홍씨, 부모, 레고

220311의 기록

by 엉망

#1

요 며칠과 다름없이 책을 읽고 TV를 보고 레고를 만들고 멍멍이를 쓰다듬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료한 듯 하지만 시간은 엄청 빨리 가는 휴가다. 보람도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하다. 서양 철학사를 다룬 책에선 드디어 플라톤이 본격 등장했다.


#2

TV로 본 역사 콘텐츠의 주인공은 혜경궁 홍씨와 정조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를 왕으로 키워낸 세월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 선조와 인목왕후, 광해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던 중 청첩장 봉투가 배송됐다.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가정이 생기고 부모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 체감됐다. 부모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산다. 그 상처의 대부분은 어린시절에 생성된다고 한다. 한 아이의 어린 시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 당연히 부모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이고, 우주이며, 밥이고, 생존이고, 선생이고, 눈이며 귀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포함한 누구도 부모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번 생이 처음이듯, 누구나 부모도 처음이며 미리 연습해 볼수도 없다. 어떻게 서투르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책임감과 영향력은 너무나 크다. 내 자신의 경우이든 남의 경우이든, 부모탓을 쉽게 할수가 없는 이유다.

한때는 두려움과 부담이 너무 클 것 같아서, 부모가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때도 있었다. 내 부모님의 실패, 좌절 등을 마주할 떄마다 더욱 그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친척과 자식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잃고, 심지어 사업 실패와 상관없이 법을 어겨 처벌까지 받는 모습을 보며,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원망을 완전히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 동시에 따라오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최소한, 나쁜 부모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어떤 부모도 나쁜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자식을 만나진 않았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쁜 부모도 있음을 알고 있다. 내 아버지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잘해볼려고 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고 운도 없었으며, 어쩌면 능력도 부족했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어떨까. 나의 상황은 항상 좋을까? 항상 운이 따를까? 아니, 나에게 부모가 될 능력이 있기는 할까?

결과적으로, 나는 이 물음에서 벗어났다. 답을 구한건 아니고, 이런 질문 자체가 오버스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내 생각은 좀 지나치게 호들갑이긴했다. 다들 그냥 부딪치고, 또 생각보다 잘 해내며, 또 그렇게 잘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자식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이에겐 또한 아이의 삶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 어쨌든 부모는 아이에게 우주일 수 있지만, 아이가 잘못된 우주를 바로잡고 자신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갈 수도 있는 법이니까. 멀지 않은 어느 순간엔가 부모가 될지도 모르는 나로써는, 그저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온힘을 다해 역할을 하는 수밖에.


#3

레고는 개미지옥같다. 아니 어쩌면 내 성격과 맞지 않는 취미일지도 모른다. 장난감치고는 결코 저렴하지 않은데다, 몇몇 제품은 출시와 동시에 품절되는 바람에 구하기가 어렵고, 또 그렇지 않은 제품들도 단종되면 다시 구하기가 꽤 어렵게 된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옷은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모셔두다 유행이 지나 버려버리거나, 너무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는 바람에 상해서 절반 이상을 버리는 경우도 허다한 나같은 쫄보는, 새로 산 레고가 수십개 쌓여있어도 하나를 골라 박스를 까는 게 쉽지가 않다. '아 이거 어렵게 구했는데. 이제 구하기 힘든데'라거나 '아직은 쉽게 널려있지만, 곧 단종되면 구하기 어려울건데'와 같은 생각 떄문에 과감해지기가 어려운 거다.

그러다보니 만들고자하는 의욕도, 시간도 넘치는데 자꾸 구경만 하다 또 다른 제품을 사는 단계로 넘어간다. '이건 별로 안비싸고 인기 제품도 아니니까 사면 그래도 좀 쉽게 까서 조립하겠지?' 하면서. 정말 멍청하고 돈도 아까운 짓이다.

좋은 물건이 생기면 아까워하지 않고 알차게 써야지 다시 또 좋은 물건이 들어온다는데, 나는 참 그럴 팔자가 못되나 보다. 그런데도 계속 사들이는거보면 욕망 자체는 넘치는데, 돈을 들인만큼 제대로 누리지는 못하니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다. 주말엔 과감하게, 단종된 대형 레고를 하나 까버려야겠다.

욕심 많은 쫄보의 방에서 쌓여만 가는 레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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