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알았을 때 그의 아이디는 '아쭈구리'였다. 당시 세간에 유행했던 개그 코드를 소리 나는 대로 영문으로 만든 'ajjuguri'에는 그 사람 특유의 유쾌함과 발랄함이 묻어났다.
문답 형식으로 간단명료하게 만든 자기소개 100문 100답 파일에는 볶음 요리를 잘한다고 씌어 있었다. 괄호 안에 '환상적'이라는 문구는 그의 명쾌한 성격을 짐작케 했다.
탁구공처럼 통통 튀는 문체와 순수한 선의가 고마웠다.
스치듯 몇 마디 나눈 채팅 방에서 가볍게 시작된 이메일 펜팔이었다.
교환 일기를 쓰듯 2년 가까이 서로 메일로만 일상을 나누었다. 그의 목소리가 궁금했지만 짧은 음악 메시지로만 소통하는 룰을 먼저 깰 수 없었다.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편지 말미에 인기 있는 시를 적어 보내 주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직접 워드 친 파일을 보내주기도 했다. 원태연, 이정하, 안도연 시인의 감성 충만한 작품이 많았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가을동화 OST 테이프를 간식과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내 속상한 푸념에 귀 기울여 주기도 했다. 친절하고 고마운 오빠였지만 직접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태백에서, 나는 대구에서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 번 연락이 끊기면 1년이 넘는 공백 기간이 있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잠실 롯데월드에서였다. 내 친구 은희가 함께였고 그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낯선 도시의 밤 아파트 숲길 사이에서 긴장한 듯 오류동 우리 집 주소를 찾아 나를 안내하던 그의 서먹한 몸짓이 기억난다.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는 사회 초년생이 되어 있었고, 퇴근 시간, 교문 앞에 그의 티코가 서 있었다. 안내견 강산이가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킁킁거렸고 우리는 어색하지 않은 척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쉬는 날마다 내게로 달려왔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가는 그가 고마웠다. 그가 오는 날을 기다렸고 헤어지는 시간이 아쉬웠다. 생존의 섬과도 같았던 익산에 그가 다녀 가고 나면 지구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했다.
시댁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모두가 많이 울었고 아팠다.
그는 전출을 단행했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여의도 사학연금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늘 같은 서방님’으로 자신을 내 휴대폰에 저장한 그와의 신혼은 달콤했다. 둘이서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누볐고 원 없이 즐거웠다. 요리면 요리, 다림질이면 다림질 무엇이든 나보다 솜씨 좋게 해내는 그가 살림 전반을 세심하게 살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설거지와 청소, 그의 와이셔츠 손빨래 정도만 맡아해도 충분했다.
‘하늘 같은 남편’은 ‘차주부’가 되었다. 손발이 야무지고 날렵한 그는 무엇이든 나보다 빠르고 능숙했다. 손이 더디고 서툰 나를 곁에서 지켜보기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고심 끝에 유주를 낳고 휴대폰 속 ‘차주부’는 ‘남편’이 되었다. 사사건건 남의 편이 되는,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그의 언사에 불만이 쌓였다.
꽤나 오랫동안 그는 건조한 ‘남편’으로 내 휴대폰 속에 살았다. 유주를 낳고 키우면서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함께 기거하시기도 했고, 그가 육아 휴직을 하기도 했다.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된 나날은 가족 모두의 인내를 담보로 더디게 흘러갔다. 친정어머니가 맹장 수술을, 아버지가 당뇨 진단을 받으셨다. 무럭무럭 자라 주는 유주가 지친 어른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재주꾼인 그는 유주의 성장 동영상을 월별로 편집하여 시댁 어른들께 보냈고, 그 영상은 고스란히 귀한 추억으로 남았다.
유주가 어린이집에 가고,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나와 그도 자랐다. 엄마로서, 아빠로서 서툴고 연약한 서로에게 기댈 수 없어 서운했고 원망했다. 위로가 되지 못하는 상대를 탓하며 감정의 악순환을 무한 반복했다.
친정 식구들에게 유주를 맡기고 강원도 속초로 부부만의 여행을 떠났을 때 비로소 다정했던 그가 엿보였다. 그도 나도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몸살을 앓았다. 그의 손을 잡고 걸었던 설악산 비룡폭포 길이 너무 좋아서 휴대폰 속 ‘남편’을 ‘비룡폭포’로 바꾸었다.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비룡폭포’에서의 감각을 떠올리며 혼자 오래오래 행복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탁구동호회 회원들과, 그것도 같은 또래 남녀 소수만 어울려 꽃놀이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나서 비룡폭포‘’를 ‘ㅇ’으로 바꾸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그의 시공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떤 추측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비워내고 싶었다.
한동안 냉전이 지속됐다. 정해진 동선을 사는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그의 자유로움은 타당했지만 배우자의 여흥까지 이해해 줄 마음은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는 데에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ㅇ’은 ‘한옥’이 되었다. 전라북도 과학 선생님들이 주최한 가족 캠프에서 그는 넘치는 끼와 재치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장애 아동이 있는 가족들이 대부분이었고 부모가 장애인인 경우는 우리 가정뿐이었다 낯선 가족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이 불편해서, 내 장애가 두드러지는 현장이 싫어서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젊은 엄마들이 유연하게 아이들을 챙겨 주는 모습 앞에서 반찬 위치를 일일이 설명받아야 하는 내 입장이 옹색했다. 정작 1학년 유주와 한옥 씨는 내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는데, 내가 문제였다.
캠프 장소는 전주 한옥 마을이었다. 세 식구가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었다. 소중한 가족사진이 들어간 머그컵을 선물 받았다. 유주가 한지에 붓으로 가훈을 썼다.
한옥 씨가 즉석에서 만들어 불러준 가훈은 “삐지지 말자.”였다. 감정의 소요를 차근차근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내 미련한 성격을 겨냥한 문장이었다.
가을 단풍을 주워 천연 염색도 해보고, 비빔밥도 만들어 먹었다. 유주가 한지등을 만드는 것을 한옥 씨가 거들어 주는 동안 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잠시 뻘쭘 해지기도 했다.
가족 대항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그는 한옥팀의 조장을 맡아 분위기를 이끌었고 제기차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종합 성적이 좋아서 캠프 폐회식에서는 상도 받았다.
나에게 없는 살가운 에너지가 그에게는 있었다. 시냇물 같이 맑고 투명한 그는 고맙게도 번번이 쾌활했다.
1년이 넘도록 그는 ‘한옥’으로 머물렀다. 한옥 씨 덕분에 우리 세 식구는 오붓한 호캉스를 즐기기도 했고, 뜨거운 한여름 바닷가 파도도 맛봤다. 부산 벡스코를 두 번이나 다녀왔고, 영덕 대게도 배불리 먹었다.
전투적으로 게살을 바르는 그에게 유주의 치명적인 한 마디. “아빠, 똥 마려워.” 낯설고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유주의 일거수일투족은 오롯이 한옥 씨의 돌봄으로 채워졌다.
베트남에서 장염으로 고생했던 한옥 씨가 두 번째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가 괌으로 정해지는 순간부터 준비 왕인 그는 입국 심사 팁은 물론 1 괌, 2 괌, 6 괌까지 마니아들의 블로그를 섭렵했다. 쇼핑이며 수상 레저의 활기가 넘치는 괌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로 붐볐다.
무안 공항 대기실 텔레비전에서 카봇이 방송되고 있을 정도로 꼬마 여행객들이 바글거렸다. 유주를 동행하지 못한 아쉬움에 못내 마음이 무거웠지만 가족 여행 사전 답사라 생각하기로 했다.
괌은 ‘차모로족’이라는 원주민이 사는 섬이었다. 베트남에서 장염의 지독한 쓴맛을 봤던 우리 부부는 아프면 안 된다는 불안으로 긴장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그는 우리나라 제품이 발견될 때마다 환호하며 초등학생처럼 신기해했다. 다양한 먹거리도 그의 입맛에 딱 맞는다면서 자신은 선진국 형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오히려 버거도 라이스도 너무 짜서 먹지 못하는 내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TARJAR 워터파크에 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주를 생각했다. 유주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놀아야겠다고 둘이서 끊임없이 얘기하며 슬라이드를 탔다.
겁이 많아서 물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나를 그는 참을성 있게 도와주었다. 서서히 경직이 풀리고 물에 적응했다.
차모로 원주민처럼 괌을 마음에 들어 하는 한옥 씨는 ‘차모로’가 되었다. 마침 성도 차 씨 아니던가. 아직 유주와 함께 하는 2 괌은 하지 못했다. 코로나 19 재난으로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길도 꽉 막혀 버렸다. 올여름에는 호캉스를 너머 홈캉스를 대비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유주의 3학년이 온라인으로 5월에나 시작되었고, 경기도 하남에 사는 조카 민창이는 여름 방학을 앞둔 7월인데도 주 1회 등교한다.
코로나 감옥이 싫다. 차모로 씨랑 유주랑 셋이서 괌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이탈리아도 가봤으면 좋겠다. 유주의 정체성이 견고해져서 유연한 눈으로 넓은 세상을 해석할 줄 아는 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며칠 전에 ‘차모로’에서 ‘모로’를 지웠다. 그가 주말마다 동료들과 어울려서 혼자만 바쁘게 지리산 둘레길이다 옥산 저수지다 쏘다니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맹인으로서는 이해했지만 아내로서 달가울 리 없는 그의 자유는 맥없이 아슬아슬했다.
수시로 바뀌는 그의 닉네임에는 남모르는 내 감정이 묻어난다. 감사도 사랑도 행복도 원망도 비난도 고독도 그로 인해 절절이 체감한다.
임경선 작가가 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을 읽었다.
차모로든 차든 그는 내 인생 끝까지 곁에 남아 있을 거다. 나 역시 그의 곁에서 할머니가 되리라.
실컷 사랑하고, 실컷 미워하고, 실컷 부대끼면서 그와 나는 운명 공동체로 굳어져 서로의 곁을 지킬 거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해 티격태격하면서 먼저 가는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순전한 존경으로 내 안에 그의 역사가 완성되기를, 한 생명의 세계가 된 부모 역할을 부디 성실하게 완수하기를, 평범하지 않은 우리 사랑 끝까지 아름답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