꿋꿋한 사람들

by 밀도


흰 지팡이 군단이 모였다. 영등포시장 지하철역에 비상이 걸렸고 맹인들은 삼삼오오 안내 도우미를 신청했다. 주최 측에서 배치한 자원봉사 인력이 구간구간 우리를 토스했다. 회의장까지 10여분 남짓 걷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팔꿈치 주인이 바뀌었다.

전국 맹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료교사들의 1박 연수였다. 주최하는 이도 참석하는 이도 하나같이 앞을 못 봤다. 행사 준비부터 진행 과정 면면에 근로지원 인력이 대거 투입됐다. 학식 있는 맹인들 모임이었지만 낯선 장소에서의 단독 행사는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100명 가까운 인원이 대회의실을 채웠다. 각 학교 대표자가 마이크를 잡고 근황을 공지했다. 동석한 선생님들을 일일이 거명하고 개별 목소리로 인사했다. 시간이 걸려도 눈감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상견례 절차였다.

이료교사들이 모였으니 거두절미, 안마 관련 학술 강의부터 시작했다. 대한안마사협회 정책실장의 업종 안정화 방안에 대한 현황 설명이 있었고, 추진 과제에 관한 질의가 오갔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을 거쳐 국민건강보험 적용까지 향후 안마업계의 발전 방향 모델을 제시했다.

마이크에서 명료하게 흘러나오는 발표자 음성은 총총한 귓바퀴들 속으로 밀도 높게 흡수됐다.

딱딱한 사회 현안 논의가 끝나고,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등장했다.

“저를 따라 해 보세요.”가 통하지 않는 연수생들이다.

“자 선생님들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립니다. 왼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하고, 오른손바닥은 땅을 보게 만들어 주세요. 지금부터 하나에는 오른손을 움직여 왼손바닥을 치고, 둘에는 오른쪽 옆사람 왼손에 내 오른손바닥을 올리며 손뼉 칩니다.”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구체적 해설이 필수였다. 동요를 부르며 사회자가 주문하는 대로 손뼉 치면서 오른손 두 번, 왼손 세 번 정신없이 방향을 바꾸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행운권 추첨 경품으로 음성체중계며 무선충전기, 안마사 필수템 손톱깎이까지 푸짐하게 쏟아졌다.

도움 인력이 빠듯했다. 자율배식 식당에서 우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하게 날라다 주는 접시를 받았다. 테두리가 없는 둥근 접시 안에 밥과 반찬이 담겨 있었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맛보며 음식 정체를 확인했다. 집에서는 식탁을 차리면서 코를 살짝 동원하는 종족이었으나 그곳은 사회적 공간이었다. 혀끝에 닿은 반찬 정보를 점잖게 공유하며 식사했다.

눈앞에 사물만 간신히 식별하는 저시력 선배를 따라 숙소로 올라갔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어떻게 객실을 찾을 것인가.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동물적 촉수로 방향을 잡아 탐색했다.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밀며 진행하다 보니 객실 문에 닿았고, 거기서 선배가 갑자기 유레카를 외쳤다.

“여기 호수가 양각으로 크게 쓰여있네. 이거 만져봐.”

스티커 재질로 숫자가 붙어 있었다. 가만히 만져 보니 301이 아닌가. 무난히 303호에 닿았다. 벽을 더듬어 콘센트를 찾은 다음 휴대폰 충전기부터 꽂았다.

침대가 있는 방에 당도하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여자들은 짐을 정리하며 화장실 위치와 방 구조를 몸에 익혔다. 강원도에서 전남 목포까지 8도 각지에서 모인 우리였으나 하는 일도 생각도 고충도 데칼코마니가 따로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세 가지 성별이 있어. 여자, 남자, 장애인”

“내가 올 해로 25년 차다. 그런데 신규 비장애인 평가 담당자가 와서 존대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어투로 서류 양식을 수정하라고 하는데, 그쪽이 꼭 선임자 같더라.”“교내에서 근로지원 같이 다니면 무능해 보인다 하고, 혼자 다니면 민폐 끼친다 하고…”

쉽지가 않다. 겉으로야 맷집 좋은 척 웃지만 가면을 하나씩 덮어쓰고 곪아터진 속을 감추기까지 최선이다.

지방에 있는 모교 행사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동문회장이 내려왔다. 평소 남다른 하이텐션을 자랑하는 에너자이저인데, 전에 없이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사실은 내가 며칠 전에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나가다가 아파트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아직 퇴원을 못해서 겨우 각서 쓰고 오늘 외출 나왔다니까. 죽는 줄 알았네. 김 선생도 조심해요.”

허리를 부여잡은 채 한 걸음 떼는 것도 힘에 부쳐했다.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는 것이 일상다반사다. 일평생 고객 몸 주무르느라 손목이며 어깨, 무릎 다 망가져도 먹고 살 기술 있음에 안도하는 애잔한 국민이다.

202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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