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소설 공부하는 데 쓰기 윤리에 대해 배웠거든요.
누구 얘기인지 주변인들도 특정할 수 없도록 정성껏 가공할 것,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2차 가해가 되는 내용은 절대 삼갈 것, 아무리 가까운 지인 사연이라도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미련 없이 폐기할 것.”
“내 얘기 써요. 나 고소 안 할게.”
우리 활동샘 워딩.
정말 못 말린다니까.
“에이, 선생님은 평화주의자시라 안 돼요. 사건이 없단 말이죠.
주인공에게는 반드시 콤플렉스를 주라 했는데, 선생님은 남들 없는 아들도 있으시고.
어디 서울대 출신 파일럿이 예사 스펙이신가요?”
사실 이제껏 아무 부담 없이 가벽게 읽었던 그 수많은 소설 한 편 한 편이 다시 보이는 거지
작가들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구상을 해서 인물 하나하나를 구현했을까.
개연성이 살아 있고, 스토리가 찰지고, 무엇보다 독자의 가슴을 때리는 묵직한 주제까지 가지런히 담은 이야기.
읽는 건 아무나 하지만 쓰는 건 절대 다른 차원의 영역이 나니.
‘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
주제를 더 부각시킬 수 있는 외모며 복장, 언어와 행동을 골몰하고, 사건과 갈등과 욕망을 잘 버무려서 맛깔나는 서사를 완성하는 거야.
종국에는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결말을 설정해 두고, 첫 문단에 들어가야 할 요소들을 고민하고.
희곡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공부법이라 하셨어.
나 안 그래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이강백이 쓴 『들판에서』를 얼마 전에 읽었잖아.
영업 사원 모양으로 유주에게 호들갑 떨며,
“여보게, 교과서에 나오는 들판에서 완전 재미있음.”
“아 네.”
그게 끝이야.
하긴 뭐 유치원 다닐 때도.
“유주야, 이 동화책 진짜 재미있네.”
“어, 그럼 엄마 많이 읽어.”
요즘 소녀는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 푹 빠지셨단다.
그거 보면서 우느라 막힌 코가 아주 시원하게 뚫렸다나.
뭐 동생이 죽었는데 어쩌고, 키스신이 나왔는데 어쩌고.
교과서를 그 반의 반만이라도 좀 보셨으면….
“설마 나 평생 모쏠은 아니겠지?”
“어허, 짚신도 다 짝이 있어요.”
“뭐야 지금 딸을 짚신 취급하는 거임?”
“뭔솔, 이거 그냥 속담이거든.”
그나저나 강산아, 누나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슬픈데 웃기고, 술술 읽히는데 여운이 남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단 마리오.
누나 첫 문단 쓰는 과제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아주 머리를 쥐어뜯다가.
“나는 순 할 순을 사랑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문단을 썼지비.
순 할 순이 누구냐고?
강산이도 잘 아는 사람.
강산이를 아주 많이 사랑했던 남자.
시방 스무고개 하는 거냐고?
OK 여기까지.
솔직히 구상한 이야기가 1도 없어서...
세상에 모든 소설가들이 한없이, 티 없이 우러러 보이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