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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세계에서, 김성은입니다

by 밀도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김동식 작가가 쓴 〈회색인간〉이다. 젊은 감각과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 속에는 저자의 경쾌하고도 거침없는 통찰이 녹아 있다.

〈회색인간〉은 지저세계로 납치된 10,000명의 인간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노동과 폭력을, 그로 인해 허물어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며 기록하기를 염원하는 인간의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지저세계로 납치되어 야만적인 허기에 노출된 채 점점 포악해지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닷없이 우리 반 학생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지저세계로 추락한 사람들, ‘장애인’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무너져 버린 자존심만큼 자괴감에 휩싸여 몸부림치면서도 웃고 있는 사람들이다.

A는 도서관 사서로 일 하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뇌진탕에 걸려 실명했다. 우반신이 마비되어 발음도 거동도 부자연스럽다.

B는 목회자로 평생을 순종했고, C는 분식집에서, 철공소에서, 공사 현장에서 우직하게 육체노동을 했다. 일구어 놓은 재산이 많지 않았어도 하루하루 개미처럼 성실하게 밥벌이하는 시민이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직장 생활하던 D는 소문난 ‘일잘러’였다. 사내 연애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예쁜 딸도 하나 키웠다. 젊은 건물주로 노후까지 대비해 둔 40대 남자에게 시련은 폭우처럼 쏟아졌다. 코로나 시국에 상가가 분양되지 않았고, 번창하던 PC방 사업이 휘청했다.

스트레스는 그의 몸을 무너트렸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으며, 이혼을 했고, 하루아침에 혼자서는 운신이 곤란한 기초수급대상자 신세가 됐다. 그렇게 5년을 칩거한 끝에 우리 학교를 찾은 거다.

첫 등교하던 날 아침, 스쿨버스를 타러 나오는 길목 어귀에서 발목을 접질린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교실에 들어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새 봄의 생기나 의지는커녕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하루, 이틀 학교 환경이 익숙해지고 급우들과의 유대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그 본연의 밝은 성격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막막하게 집안에 머물었던 5년 세월이 그의 체력을 앗아가 버렸어도, 그리하여 매일 두 시간 진행되는 안마 실습 훈련이 힘에 부쳤어도 그는 특유의 입담과 모범적인 학습 태도로 학급 분위기를 살게 했다.

그런가 하면 E의 신조는 이랬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주는 거예요.”

본인에게 해당되지 않는 학교 공지사항이나 알림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무조건 신청하고, 항의하고, 요구했다.

“제 후배가 **시청의 장인데….

주민센터 가서 악을 악을 쓰면 금방 해결돼요. 그거 내가 아주 잘하거든.

오늘은 우울증 약을 먹었더니….”

식탐도 욕심도 말도 번번이 넘쳤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1인분의 삶을 영위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저세계로 떨어진 사람들이라서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지만, 어쩌면 불빛조차 감별 못하는 내 입장이 제일 곤궁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무릇 인간은 자기 손톱 밑 가시를 제일 아프게 느끼는 동물이니까.

역시 지저세계에 살고 있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께 맹학교를 졸업했지만 잔존시력이 있어 일상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비장애인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맘인데, 여행을 좋아하여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제 힘으로 누비고 다닌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인 데다가 잔존시력이 있으니 아쉬운 대로 주도적인 선택이 가능한 그녀가 앞뒤 없이 눈물을 쏟았다.

“언니, 미안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나 너무 힘들어.

어느 때는 사람들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고, 사람 형체는 보여도 그게 누군지 모르니 인사 못해서 오해받고 사과하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비장애인 친구는 말했다.

“친구야. 내가 너한테 이 속을 풀고 싶다가도 내 얘기가 어쩌면 너에게는 사치처럼 들릴지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지상이든 지저든 저마다의 고충은 있는 모양이었다.

공정하다고 해야 할까?

고통은 ‘절댓값’을 가지나 보다 싶기도 했다.

다만 타인의 삶이라는 것이 무턱대고 화려하게만 보여 느끼는 박탈감이 덧없었다.

나는 지저세계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지상으로 올라갈 일이 없다.

이제 막 이곳으로 납치된 사람들의 당혹스러워하는 양을 지켜보면서 ‘1층보다는 2층이, 8층보다는 10층의 충격이 더 크겠구나’ 짐작하는 거다.

소설 속 회색 인간들은 무슨 이유에서 자신들의 억울한 삶이 그림으로 혹은 이야기로 남겨지길 원했을까?

눈 감고 사는 이들의 왕국을 소설로 엮고 싶은 나의 열망과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는지.

“저는 소설가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써낼 수 있습니다.”

[회색인간/김동식/요다]

다소 거칠지는 몰라도 나는 선량하고도 추악한 이 지저세계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한 줄기 서사로 엮어내고 싶다.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무슨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지저세계를 취재하는 특파원의 정체성으로라도 온전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특수와 보편 혹은 평범과 비범 사이 막막한 절벽에 나선형의 문화 사다리 하나 놓을 수 있으면 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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