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습니다. 봄맞이 준비들은 잘 되어 가시나요?
학교에 몸담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이 저에게는 본격적인 출발의 신호처럼 느껴집니다. 2024년의 달력이 이미 두 장이나 넘어간 시점인데 말이지요.
오늘 제가 사는 곳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난 딸아이가 환호하며 창가에 붙어 서서 아름다운 풍경에 눈과 마음을 내어 줍니다. 자정이 넘도록 화면해설 드라마에 귀를 기울인 엄마도 느릿느릿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독자님들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시나요? 오늘은 저의 스트레스 퇴치 비법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는 처방이라면 여행, 운동, 음주, 흡연, 수다, 산책, 게임, 노래 같은 방법 정도가 있을까요? 저의 경우 가장 손쉽고도 유용하게 힐링하며 킬링타임하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정신 줄을 놓고 드라마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완결된 화면해설 작품을 하나 선택한 다음 최단시간 동안 정주행하는 방식인데요. 멋진 남주의 명대사라도 귀에 꽂히면 그렇게 흥겨울 수가 없어요. 작품별로 인상적인 대사를 기록해 둘 만큼 드라마 작가 취향도 뚜렷하지요.
독자님들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희경 작가!’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이니 달갑지 않으시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몇 작품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 겨울바람이 분다〉, 〈괜찮아, 사랑이야〉, 〈빠담빠담〉, 〈디어 마이 프렌즈〉, 〈라이브〉, 〈거짓말〉 등 노희경 드라마에는 감정선이 분명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필자가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게 되는 대목이 많은 이유를 찾자면 아마 장애인이 적잖이 등장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 겨울바람이 분다〉에서는 여주 송혜교가 시각장애인으로 나옵니다. 부잣집 상속녀인 오영은 집사 왕비서의 과보호 하에 매우 경직된 삶을 살아요. 20대 청춘임에도 사생활을 누려본 적 없는 영에게 자유로운 영혼인 수의 등장은 아슬아슬 신선합니다. 자신을 영의 오누이 오수라 주장하는 남주 조인성의 직업은 겜블러예요. 대놓고 의심할 수도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오수의 손을 오영은 잡습니다. 영과 수의 외출이 잦아지자 왕비서가 수를 나무라요. 그 장면에서 수는 적개심을 담아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그러니, 시각장애인인 영인 집구석에 가만히 틀어박혀, 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붙박이 가구처럼 (강조) 처박혀 살아야 한다?”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는 시크한 남주 재열이 투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하우스메이트 광수에게,
“장애 가졌다고 차별대우 안 할 테니, 특별대우도 바라지 마.”
쓰고 보니 제 영혼을 사로잡은 대사를 모두 배우 조인성이 했네요. 조인성은 〈디어 마이 프렌즈〉에도 등장합니다. 여주 완의 완벽한 연인 연하.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됩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게 덤덤히 재활 운동을 해요. 극 중 완의 어머니 고두심 배우의 대사가 기억납니다.
“다 만나도 유부남이랑 장애인은 안 돼!”
완의 외삼촌, 즉 난희의 동생이 장애인이에요. 동생을 살뜰히 살피며 평생을 함께한 누나지만 딸에게는 그 아픔과 수고를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있지요.
이런 연유로 저는 노희경 작가를 존경합니다. 무시무시한 통찰이 아닐 수 없어요. 불편하고 뾰족한 말인데 따뜻하거든요. 사랑이 묻어 있달까요?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대사에 감탄하고, 감동적인 스토리에 울고 웃는 동안 스트레스는 눈 녹듯 사라집니다. 최근에는 2018년에 방영된 〈미스터 선샤인〉을 들었어요. 뼈아픈 우리 역사를 입체적으로 그린 드라마로, 미스 문라이트라고 부제를 붙여주고 싶은 드라마였지요. 힘없는 백성들의 애국이 무엇인지, 종국에는 하나가 되고야 마는 우리 겨레 민족성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감칠맛 나는 유머가 또 일품이었지요.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는 삶에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도 하지만 번번이 질병을 야기시켜요. 근사한 자연 풍광을 한눈에 담아 힐링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당한 우리라서 억울한 감이 없지 않지만, 따뜻한 이야기와 자연의 소리로 두 귀를 채워봅시다. 사실 눈감고 사는 우리들에게 귀는 무엇보다 소중한 창이잖아요? 빗소리를 좋아해서 가끔은 ASMR을 듣습니다. 커피와 플레인 요구르트로 코와 혀를 호강시키고, 애정하는 잔나비 음악을 들으며 흥얼흥얼 노래도 불러요. 평정심을 지켜가는 것, 참 어렵습니다. 모래성같이 쉬 무너져버리는, 유리 멘털에게 화면해설 드라마는 든든한 ‘백’이에요. 명대사를 타이핑하며 햇병아리 작가는 꿈꿉니다. ‘언젠가는…. 비수 같은 심쿵 문장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