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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부장의 탄생

by 밀도

동네방네 개나리며 목련, 진달래가 만발입니다. 식목일이 있고, 봄소풍이 있고,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이에요. 특수학교는 감염에 취약한 학생들이 워낙 많이 모여 있을뿐더러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중증 친구들의 경우 체온을 재거나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다 보니 동료 선생님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급식도 교실마다 도시락을 분배하여 학급 단위로 먹느라 점심시간이면 학교 건물 전체에 끌차 끄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신속항원검사니 PCR검사니 확진자가 속속 발생하는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은 학교에 있을 때 가장 생기롭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층층이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맹학생들이 흰 지팡이를 치며 운동장과 복도를 질서 있게 오가는 풍경은 자연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니까요.

한편 딸아이의 5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와는 다르게, 목소리 크고 활기 뿜뿜한 딸아이는 운동을 무척 즐겨요. 발표력도 좋습니다. 독창대회에서 교내 1등을 차지할 만큼 무대 체질에 소문난 ‘오지랖퍼’인 걸 보면 아빠 유전자가 아주 진하게 발현된 딸이지요. 책 좋아하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질색하는 엄마 유전자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무언가를 듣거나 읽거나 쓰고 있는 엄마는 씩씩한 딸이 슬라임 말고, 먹방 말고 책을 좋아하기를 바랐습니다. 일찍이 한글도 못 뗀 아이에게 독서 방문 수업을 시켰더랬지요. 마침 딸아이 친구 엄마가 유명 대기업에서 오디오북 콘텐츠 영업을 하고 있어 거금을 들여 회원 가입도 했습니다. 어마무시한 아동 도서 전집이 오디오북으로 제공되고 있었지만 태블릿은 음성지원 접근성이 좋지 않았어요. 알파벳 파닉스며 생각토론 화상 수업을 시켰습니다. 싫어라 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숙제를 시키고, 교재를 읽어주었어요.

아기 때부터 유일하게 엄마가 고수하던 잠자리 동화책 시간 덕분에 책육아는 겨우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물론 전국에 있는 점자도서관을 샅샅이 뒤져서 무민, 수학동화 시리즈, 돈키호테 등을 읽어주었습니다. 데이지 도서 형태로는 신간을 빠르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지만 점자정보단말기로 한 줄 한 줄 읽어주기가 감질났어요. 자동 스크롤 기능을 사용해 봐도 더딘 것은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점자종이책 지면을 두 손바닥 가득 만질 때 비로소 뻥 뚫린 고속도로를 마주한 듯 시원하게 읽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속도가 붙고 감정이 살면 딸아이도 귀를 쫑긋하고 이야기에 집중해요. 데이지 파일을 굳이 점역 출력하여 읽어주는 수고를, 그래서 마다할 수 없었습니다.

1학년 학급 활동으로 자기소개 카드를 만들어 집에 들고 온 따님이 말씀하시기를,

“엄마, 나 소개 카드 만들었어. 좋아하는 것 뭐라고 썼게?”

“춤.”

“오, 딩 동 댕!”

“그럼 싫어하는 건 뭐 썼어?”

“응, 책”

‘간단명료하시기도…. 이 자식이… 엄마가 저 책 한 권이라도 더 읽히려고 그간 얼마나 애를 썼는데….’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가 치밀었지만, 꾹 참으며 쓰게 웃을 수밖에요. 나는 책을 사랑한다지만, 문해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학습 능력이라지만, 요즘 엄마들이 텔레비전을 치운 거실 벽을 빽빽한 책장으로 둘러치고 독서 교육에 열을 올린다고들 한다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인생 만사가 다큐인 저는 딸의 명쾌한 한 마디에 깊이 상심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하도 책 책 책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할 텐데….’

소심한 엄마가 안달하는 사이에도 아이는 쑥쑥 자랐습니다. 태권도 2품을 따고, 영어 동화 스피킹 대회에 나가고,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줄 알게 되었네요. 면치기 실력을 뽐내며 유쾌, 상쾌, 통쾌한 딸이 다급하게 희소식을 전합니다.

“엄마, 나 도서부장 됐어. 우리 반에서 100권 미션하고 있는데 내가 한다고 했어.”

잠자리에서 읽어주는 동화책 내용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때 내심 놀라며 폭풍 칭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 중심으로 몇 권 읽히기에도 성공했지만, 책 중독자 엄마는 늘 목이 말랐어요. 잠들기 전엔 꼭 엄마 책을 찾는 딸이 능동적으로 독서하기를, 나아가 읽고 쓰는 힘을 길러 내면이 탄탄한 큰사람으로 자라기를 엄마는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랍니다. 강제인 듯, 강제 아닌, 강제 같은 흑심을 맥없이 들켜 버려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꿋꿋하게 설파해 보렵니다. 독자님들 또한 읽고 쓰기의 충일감을 몸소 체험해 보시길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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