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이 온통 초록빛입니다. 나무를 심고 꽃이 피는 계절이에요. 이 푸르름 속에 ‘장애인의 날’이 있네요. 중학생 시절에는 장애 관련 교외 행사가 그렇게 꺼려질 수 없었어요. 언론에서 반짝 ‘장애인’을 영웅시하거나 동정팔이 언저리로 소비하는 행태가 그냥 영혼 없는 관례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드라마 세트장 소품처럼 으레 그곳에 있어야 하고, 응당 다루어져야 하는 그 무엇쯤으로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사회적 장애는 곳곳에 산재합니다. 이동권이며 교육권 등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 장애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요. 벽처럼 느껴지는 어떤 한계는 개인의 의지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요. 열심히 공부해서 안정된 직업을 가졌어도 조직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애인들이 많다고 해요. 비장애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야 하는 미묘한 노력과 피로가 사회성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됩니다. 꼭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가져야 하는 사회적 얼굴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계실 거예요.
새 학년이 시작되고 우리 반에도 성인 신입생들이 입학했습니다. 1학년 1반 교실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늦깎이 학교생활을 결심한, 담임 선생님보다 연배가 높은 새내기들이에요. 흰 지팡이, 점자, 한소네, 센스리더라는 단어가 외래어처럼 낯설게 들립니다. 저시력인들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확대 프로그램과 OCR 앱들을 신기해하며 신바람 나게 배웁니다.
“우리 와이프가요. 날마다 빠짐없이 영양제를 챙겨줘서 그동안 감사히 받아먹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무슨 약인지를 몰랐던 거지. 어제 보조공학 시간에 배운 설리번 앱을 설치해서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겠습니까? 아이고 그랬더니 무슨 갱년기 여성 어쩌고, 콜라겐이 어쩌고… 이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렸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 반 학생들 덕에 웃습니다. 원거리 통학에 하루 종일 책걸상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을 텐데 조·종례 시간 분위기가 한결같이 명랑해요. 우유 급식도 초등학생처럼 잘 챙겨 먹습니다. 학급 자율 시간에는 분담하여 청소기를 돌리고 손걸레로 창틀이며 사물함을 닦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선배들과 어울려 분리수거장에 다녀오고, 이동 수업 시간에는 교실 전등 소등이며 난방기를 단속합니다.
사실 이료재활전공과에는 저보다 어린 학생이 별로 없어요. 삼촌 혹은 이모 같은 느낌으로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된다고나 할까요? 우리 반 햇병아리들에게 흰 지팡이 용도를 설명하며 안전을 위해 앞으로는 지참하고 다닐 것을 권유했습니다. A의 대답이 이랬어요.
“네. 저는 안 그래도 시각장애인협회를 통해 정보를 듣고 흰 지팡이를 꼭 펴고 다니고 있습니다. 시력이 저하되면서 자꾸 사람들과 부딪치니까 본의 아니게 욕을 먹게 되더라고요. 시야도 좁고 해서 지팡이를 들고 다녀보니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 주고 욕먹을 일 없어서 좋습니다.”
한편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B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저는 제가 먼저 욕을 해버려요. 그래야 시비를 안 걸고 나를 못 건드리거든. 일부러 인상도 빡 쓰고 생전 웃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와이프가 제발 어디 가서 싸우지 말라고 잔소리 겁나게 했다니까요. 요즘은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웬일로 웃고 다니냐면서 좋은 일 있냐고 막 물어요.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 눈 다친 이후로 잉여 인간 같아서 사는 게 참 죄스러웠거든요. 그런데 학교 오니까 웃게도 되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B는 가족을 무척 사랑하는 가장입니다. 몸 사리지 않고 공사 현장에서 오랜 시간 노동하며 성실하게 살았어요. 타인을 배려하며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아는 모범생입니다.
젠틀한 장애인. 걸음마를 시작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이미지입니다. 식상한 사회 통념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애인 말고, 몸은 불편하지만 성숙한 인간미가 묻어나는 장애인. 우리 충분히 될 수 있잖아요.
비장애 지인들이 실제 겪은 일들을 종종 하소연합니다.
“어떤 지체장애인이 역에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직원이 조금 늦었더라. 헐레벌떡 달려온 공익요원을 보자마자 그 장애인이 목발을 휘둘러 얼굴에 상해를 입혔더라. 장애인콜을 예약하는데 콜센터 직원에게 별의별 소리를 다 하더라. 어떤 시각장애인은 하루에도 몇 건이고 민원을 접수하고, 툭하면 기사들에게 언성을 높여대는 통에 그 사람 예약은 아무도 안 가고 싶어 하더라.”
부조리한 일에는 필요에 따라 화든 민원이든 적절하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의 경우라면 조금 달랐어도 좋았겠다 싶어지는 거예요. 나의 필요를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 절차에 맞게 목적을 달성하는 것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더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어지나 봐요.
“선생님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직은 지팡이 들 생각 없습니다. 지팡이 들고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할 것 같고, 불쌍하게 볼 것 같고….”
흰 지팡이에 대한 거부감이 유독 심한 학생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관통한 감정이므로 누구보다 그 마음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아무리 지팡이 효능이 크다고 할지라도 이런 경우 더는 강권하지 않습니다. 장애를 완전히 수용하지 못한 채 위태로운 심사를 아닌 척 봉인하고 사는 착한 장애인들 많잖아요. 우리 함께 각자 가진 매력이 장애라는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도록 힘써 봅시다. 저 역시 수시로 크고 작은 벽 앞에서 암담해져요. 그럴 때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선배들에게 SOS를 칩니다. 달력에 박혀 있는 장애인의 날은 4월 20일 하루지만 우리에게 장애는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어요. 때때로 숨 막히게 지리멸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고약한 십자가,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것 없이 담백하게 지금을 즐기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하늘만 원망하며 허비하기엔 한 번 사는 인생, 너무 아깝잖아요? 제가 찾은 정답은 그저 젠틀하게 ‘나’를 사는 겁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끊어내도 멘털 관리 성공입니다. 쉽지 않더라고요. 멘털갑 순위가 있다면 저 같은 사람은 유감없이 최하 점수, 꼴찌는 떼놓은 당상입니다.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껌처럼 아주 성가시고 끈덕지거든요. 영락없는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깊은 밤, 젠틀한 독자님들을 상상해 봅니다. 그 기운에 저도 힘을 얻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