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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Mar 05. 2024

기다리는 연습

     

  새 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사들에게는 1년 중 가장 특별한 달 3월이에요. 딸아이가 6학년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빠르기도 하지요. 3월의 첫 월요일, 절로 군기가 들어갑니다. 집에서 꿀 같은 겨울방학을 보내던 아이들은 개학이 달갑지 않아요. 등교가 의무가 되면 늦잠도 자유도 영락없이 포기해야 하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납작하게 펼쳐지니까요. 반면 하루 세끼 돌아서면 밥, 일명 돌밥을 챙기느라 허덕거리던 엄마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하면 비로소 밀려드는 “내게 강 같은 평화”,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힐링 타임. 아는 분은 아실 거예요.

  사실 저는 방학 때만 잠깐씩 전업맘의 고충을 체험하는 찐 불량 엄마입니다. 요리 솜씨도 형편없고 체력도 저질이라서 딸아이에게 미안할 때가 참 많아요. 엄마보다 3주나 늦게 겨울방학을 맞이한 딸아이를 위해 우리 세 식구는 서울행 KTX에 올랐습니다. 성인이 된 후로 굳이 찾지 않았던 롯데월드가 첫 번째 목적지였어요. 복지 카드 소지자는 우선 탑승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장애인을 보호할 수 있는 성인 동승자까지만 특별대우가 허용되었으므로 아이와 함께 놀이 기구를 즐기려면 꼼짝없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요. 평일임에도 교복 입은 청소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추운 날씨에 웬 치마는 그리 짧게들 입었는지, 녀석들 건강이 걱정스러웠습니다.

  2분 남짓 바이킹 하나 타는데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후룸라이드 대기 줄에 서서 다시 두 시간을 버텼어요.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각오한 노동이었지만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유이용권을 끊을 때 알았어요. 매직패스를 별매하면 우선 탑승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매일 한정 수량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놀이기구 한 개당 약 10,000원을 더 지불하면 줄 서기 없이 탑승시켜 주는 그야말로 마법의 통행권이었어요.

  저는 기다리는 것에 제법 익숙한 사람입니다. 장애인 콜을 예약할 때마다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많잖아요. 혼자서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누구라도 어디라도 기다림은 차라리 생활이지요. 

  “아휴, 또 매직패스다. 난 저거 아니라고 봐.”

  우리 바로 뒤에 서서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학생이 친구에게 투덜거립니다.

  “돈 주고 시간을 사는 건데 뭐. 난 괜찮다고 생각해.”

  정답은 없었지만 매직 탑승자들로 인해 번번이 지연되는 순서를 감수하며 별수 없이 서 있자니, 은근히 약이 오르더라고요.

  ‘어린아이들 눈에는 저 광경이 어떻게 비칠까? 합법적인 새치기라서 괜찮은 건가? 빠듯한 살림에 아이들 손잡고 온 부모 마음 다 똑같을 텐데….’

  뒷맛이 썼습니다. 부지런하고 근성 있는 우리 민족의 K트레이드마크. ‘빨리빨리’를 모르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갈수록 속도가 생명인 사회가 되어 갑니다. 저같이 굼뜬 사람들이 살기에 퍽이나 고달픈 세상이에요. 택배도, 음식 배달도 촌각을 다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급하면 제일 먼저 생략되는 것이 배려일진대, 대책 없이 ‘슬로’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인지 자꾸 ‘이대로 괜찮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냥 조금 천천히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서 도착할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꼭 그 골인 지점에서만 행복해지는 것이 맞을까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입니다. 워낙 소심하고 수동적인 위인이 돼놔서(?) 유난히 그렇게 체감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감각도 감정도 거칠게 팽창하는 사회 분위기가 못내 불안한 거예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심지 하나씩은 품고 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독자님들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계신가요? 학기 중에는 방학을, 방학 중에는 개학을, 출근하면 퇴근을, 평일에는 주말을 저는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너무 앞만 보고 달리지는 맙시다.

  담쟁이덩굴처럼 옆 사람 표정 살피고 웃음 나누면서 어기여차, 서로를 북돋우며 사는 편이 외로운 1등 인생보다 몇 배는 더 값지고 멋지잖아요. 저는 그렇게 살아볼 참입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꾸준히 연마하다 보면 이 시골 쥐구멍에도, 볕이, 들,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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