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판정을 받았다. 통장에 기천만원이 입금됐다. 생전 만져본 적 없는 목돈이 생소했다. 거금을 손에 쥐었건만 마음이 무거웠다. 딸아이를 낮 12시 16분에 낳았다. 소임을 다 한 내 자궁은 12월 16일에 적출됐다. 자궁내막암이라고 했다. 생에 다시없을 행복이 싹튼 그곳에서 암세포가 자랐다.
명실상부 ‘고위험군’이 됐다. 여성, 장애인, 거기다 암 환자 딱지까지 붙였으니 손색없는 사회적 약자다. 동료들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태연했다. 초기에 발견하여 조치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주치의 진단을 들었을 때 잠시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남편이 서류 처리를 하러 간 사이, 대기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비로소 눈물이 났다. 암 확진자가 되고 보니 코로나 정도는 경한 일로 여겨졌다.
조직이 깨끗해 보인다고 하여 아닐 거라고 믿었다. 이른 아침 수술을 집도해 주신 주치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작별할 셈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까지 하나 장만하여 내원한 환자는 순식간에 전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맹인 된 것도 억울한데 아직도 모자란가?’
멀쩡한 것처럼 하루를 살았다. 저녁이 되면 기진맥진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디로든 혼자 훌쩍 떠나고 싶었다.
‘누구를 원망하면 속이 좀 풀릴까? 어디에 화풀이를 하면 이 두려움이 좀 가실까?’
다른 장기 아니라 자궁이라는 점에 안도했다. 햇살 같은 유주를 선물 받았으니 당장 내 뱃속에 없어도 무탈할 터였다.
아랫배에 선명한 수술 자국이 남았다. 3개월에 한 번씩 주치의를 만나 추적 관찰을 받아야 한다. 운동이니 금 주니 하는 건강 수칙이 일종의 의무가 되었다.
내 직급과 관계없이 눈 뜬 동료들에게 민폐 끼치는 것이 두려웠다.
눈 감은 동료들과는 성격 차이로 부딪쳤다. 요구에 젬병인 부장은 부원들의 이쏙을 주장하지 못했고, 다혈질 부원들은 그런 나를 공격했다. 권리 주장 혹은 쟁취 따위에 관심도 욕심도 없이 흘러온 인생이었다.
. 유리멘털 부장은 부원들에게 시달리며 눈 뜬 동료 눈치를 살폈다.
관계가 상하면 분리한 쪽은 누가 뭐래도 눈 감은 우리들일 것 같아서 뱃장 좋게 싸울 수 없었다. 불편한 공기가 감지되면 무조건 먼저 사과했고, 상대를 다독거렸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사느라고 내 몸에 암세포를 키웠나 보았다.
점자도서관에 녹음도서로 게시된 내 책을 들었다며 똑순이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도 녹내장으로 두 눈을 실명했고, 의안을 넣었다. 사립 특수학교에 근무하며 비장애인 남자와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둘을 키운다. 요리를 잘하며 의지가 강하다. 학술 토론장에서는 주저 없이 질문을 던지고, 무엇보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이다.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해 거친 싸움도 불사한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립학교를 그만둬 버렸다.
시각장애 아닌 지적장애 특수학교에서 근무하며 전맹 교사를 버거워하는 관리자들에게 거침없이 쓴소리 한다. 신혼 시절, 어디를 가나 시각장애 여자와 결혼한 남편을 천사라고 치켜세우는 주변인들 칭송에 심술이 나서 양말을 벗어던지며,
“어이, 천사 이것 좀 갖다 놔.”
나 같은 쫄보는 감이 엄두도 못 낼 ‘핵사이다’ 언행이 부럽기 그지없다.
성격은 운명을 만든다고 했던가? 내 몸에 암세포는 다름 아닌 내 성격에 기인했을진대, 누구를 원망하랴!
미안해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불편한 공기에 떠밀려 지레 사과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눈치 보지 않고 욕 좀 먹기로 마음먹었다. 관계가 상할까 전전긍긍하며 친절을 쥐어짜는 짓도 그만둘 거다. 태생이 야무지지 못한 것을 어찌하랴. 풍신난 에너지를 이젠 나에게 써볼 참이다. 돈도 쓰고 글도 쓰면서 내 만족 위주로 선택하리라.
20년 넘게 나를 알아온 언니가 그랬다.
“연습하다 보면 그것도 자연스러워질 날이 오지 않겠냐”라고….
‘숟가락이 어찌 하루아침에 포크가 되겠나?’
뾰족한 끝으로 표적을 찍어 올리는 포크처럼 담백하고 싶었으나 번번이 미련을 부렸다.
암 환자가 되고 나니 이대로 끝나버릴까 봐 조바심이 생겼다. 제대로 큰소리 한 번 못내 보고 사라질까 봐.
‘건강한 할머니 작가!’
차 떼고 포 떼고, 나 밀도가 진정 원하고 그리는 종착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