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꿈들을 위한 기록②
좀비는 내 꿈의 단골이다. 한동안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좀비물이 주춤 해서였을까. 주말을 보내고 출근을 앞둔 일요일, 오랜만에 좀비꿈을 꿨다. 꿈속에서 좀비들이랑 피 터지게 싸워서인지 겨우 일어났다.
‘부산행’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계에 좀비물이 넘쳐 나왔을 때는 좀비 꿈을 더 자꾸 꿨다. 당시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언론 시사회에 다녔었는데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꾸역꾸역 봐야 했다. 그중에는 좀비물도 있었다. ‘부산행’, ‘킹덤’, ‘월드워Z’ 이후엔 기억에 남는 좀비물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작년에 본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라 볼 만했다.
몇 년 전, 언니 집에서 객식구로 얹혀살았던 나는 9살짜리 초딩 조카와 좀비 놀이를 하곤 했다. 초딩들 눈에는 좀비들이 무섭고 신기한 존재로 느껴졌던 걸까. 조카는 ‘관절 꺾기’와 ‘눈알 뒤집히기’ 신공을 선보이며 좀비 흉내를 냈다(기특한 녀석^^). 난 당연히 좀비에게 물려 죽는 역할을 맡았다.
문득 생각해 보면 과거 꿈속에서 항상 좀비들에게 쫓기거나 도망쳤다. 좀비에 맞서 싸운 적은 거의 없었다. 좀비의 약점인 물 쪽으로 유인하거나, 좀비들을 피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좀비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좀비들이 들이닥쳤을 때 가족들을 찾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꿈속이지만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벌떡 깼다.
결혼하고 한동안 꿈속에 나오지 않았던 좀비는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에 나타났다. 오랜만에 꾼 좀비 꿈에서 난, 조금은 달라진 모습이었다. 좀비가 신혼집에 쳐들어오자 주방의자를 번쩍 들어 그 놈을 찍어 내렸다. 나조차도 놀란 괴력이었다. 신랑을 찾았지만 좀비에 물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후 엄마와 동생을 애타게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치는 줄 알았다.
좀비 한 놈을 죽였지만 또 다른 좀비들이 미친 듯이 신혼집에 몰려 들어왔다. 난 ‘아 XXXX’ 욕을 퍼붓다가 갑자기 하늘로 솟구쳤다. 좀비떼도 같이 하늘을 날며 나를 쫓아왔다. 그러다 엄마와 동생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 안심했다.
남편이 머리 말리는 소리에 꿈에서 깼다.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온몸이 쑤셨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한 놈을 물리쳐서였을까. 지난 좀비꿈과는 다르게 찝찝한 마음이 사라졌다. 남편에게 “좀비 한 놈 죽였어”라는 카톡을 보내고 뿌듯해하며 집을 나섰다.
일주일에 한 번 뵙는 상담 선생님께 좀비 꿈 얘기를 했다. 12회에 걸친 상담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좀비를 물리친 얘기를 듣고 선생님은 또 ‘깔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OO씨는 상답을 받는 동안뿐만 아니라 꿈에서도 성장한 것 같아요. 좀비에게 도망가기만 하다가 드디어 맞서 싸운 거잖아요.”
난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은 완전히 바뀌진 않지만 좋은 방향으로, 조금은 성장할 수 있어요.”
좀비 한 놈을 때려죽이고 성장했다는 말을 들었다니?!!! 상담의 큰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