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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밀니트 Oct 05. 2023

종소리

도서관 가족백일장 출품했다 탈락한 습작



‘띵-’

귓가엔 종소리, 머리는 번쩍. ‘아!’ 나만 들리는 외마디 외침. 별안간 심긴 생각의 뿌리는 과거의 나와 융합되어 새로이 삶을 바라보게 한다. 각성 혹은 경종이다. 37년간 울렸던 세 번의 종소리가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지금 나는 네 번째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간의 메아리를 따라가 본다.



인생 첫 종소리는 ‘자기혐오의 시작’이었다.

괴롭지만 떠올려보자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왼쪽 뺨 큰 점 때문에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내 일기를 본 담임 선생님이 글재주가 있다며 밀어주고 싶다고 하셨고, 교내 혹은 대외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곧잘 타오기도 했다. 부모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글공부를 하라고 하셨고, 아이들의 괴롭힘도 점차 잦아들었다. 짝사랑이었지만 첫사랑도 시작되며 향긋한 봄이 내게도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선생님은 날 교단 앞으로 부르셨다. 갑자기 큰 백과사전으로 힘껏 내 머리를 ‘쾅’ 하고 내리쳤다. 정말 물리적으로 귀에서 ‘찡-’ 소리가 났고 머리가 번쩍 울렸다.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떠들어 쓰게 된 반성문이 화근이었다. 구체적으론 반성문이 건방져서다.

 ‘잘해주니 머리 위로 기어오른다, 네 부모님은 너를 그렇게 가르쳤냐, 너는 그따위로 살면 안 된다’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수많은 말과 함께, 손에 잡히는 아무것들을 들고 1시간 내내 머리와 따귀를 때리셨다. 종료 벨이 울려서야 끝이 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선 이상하게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내가 울었다면 그보다 일찍 끝났을까?

 몸을 돌려 내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첫사랑의 이상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날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셨고 선생님과 대화 아닌 대화를 했지만, 그로부터 1년간 선생님과 반 친구들로부터 심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전학 갈 형편이 안 되어 끝까지 버티다 졸업했다. 성인이 되어 촌지 때문이라는 걸 인지했으나, 당시엔 영문을 몰랐다. 어린 내가 내린 결론은 ‘잘해 주실 때 눈치껏 행동했어야 했는데 칭찬에 취해서 건방졌구나. 난 고작 그런 아이구나.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무서운 존재구나. 사람은 무서운 존재구나.’

 이후 나는 선생님보다, 나를 신나게 괴롭히던 친구들보다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종소리는 ‘꿈의 시작’이었다.

 간호과에 입학하던 해 겨울, 첫 병원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수능 실패로 성적에 맞춰서, 취업이 잘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들어온 간호학과 공부가 전혀 맞지 않아 진지하게 재수를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이라 떨리는 손길로 혈압을 쟀는데 환자분이 건넨 따뜻한 목소리,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순간 온몸의 소름과 함께 머리가 ‘띵-’, 비로소 온 세상이 환해졌다.  ‘내 사소한 손길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구나.’

간호사를 천직으로 여겨 열심히 공부해 대학병원 취업에 성공했고, 동시에 학교를 편입해 3교대 근무와 함께 주경야독했다. 몸은 고됐지만 암울했던 학창 시절에 비하면 간호사로서의 소명감으로 행복했던 20대였다.


 

세 번째 종소리인 ‘나로서기의 시작’은 역설적이게도 정신적으로 바닥을 보았을 때 울리게 되었다.

29세에 공공기관 이직으로 상경을 하면서 사춘기에도 겪지 않았던 방황이 시작되었다. 연고도 없이 홀로 시작한 타지 생활, 보수적인 조직에서 일과 인간관계로 적응하기 힘든 와중 유일하게 의지했던 연인으로부터 첫 실연을 겪었다. 술 또는 수면제로 버티던 어느 날 10평 자취방에 누워 취기 어린 눈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과 함께 머리를 또 한 번 울리는 그 소리.


‘치열하게 달려왔는데 돌아보니 착한 딸, 좋은 간호사로서의 나만 존재하는구나.’

‘내 인생인데 정작 나를 위한 삶은 아니었구나.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잘하는 사람일까?’


그러나 막연한 느낌만 믿고 힘들게 쌓아온 모든 것들을 놓기엔 더 이상 치기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취업률이 바닥 치는 현실에선 사치로운 생각이라 여겨 그 소리들을 무시했다. 결혼 후에도 관성처럼 야간 대학원에 진학해 자기 계발에 힘썼고, 고역 같던 직장 생활도 언제나 그랬듯 꾸역꾸역 버텼다. 아이를 낳고 갖게 된 육아휴직의 끝 무렵, 고민 끝에 마지막 도전(복직)을 해보기로 했다. 동료들이 가장 기피하는 부서가 배정됐지만 바로 포기하면 왠지 후회할 것만 같았고, 해보는 데까진 해보고 싶었다. 절대 싫다는 내면의 소리를 무시한 채. 그렇게 수도권에서 강원도 원주로의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등원은 남편이, 하원 및 잠자리까지의 육아는 내가 온전히 맡으며 주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지만 늘 그랬듯 그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은 여전히 견딜 수 없었고, 그곳에서의 내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으며 마음속 깊이 불행했다. 끊임없이 내면에서 소리쳤다.


‘24년이면 할 만큼 했어. 이젠 내려놓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 나를 제발 좀 사랑해 줘.’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포기를 선택했다.

 

 네 번째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젠 스스로 찾고 선택하고자 한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마음껏 해보고, 나 자신을 알아갈 시간을 무기한 주기로 했다. 조금 이기적이게 사치 한번 부리기로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 하나, 나는 여전히 글을 사랑한다. 이 글도 그 일환이자 탐색의 과정이다. 이젠 설레는 마음 한가득이다. 지금부터 찾아갈 종소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무척 기대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까지 당신의 삶에서는 어떤 종소리가 울렸는가?

그리하여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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