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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Oct 07. 2019

가족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 입양.

남동생이 입양할 아기 사진을 보내줬다. 올케와 아기. 엄마와 딸로서 새로이 인연을 맺을 두 사람이 사진 속에서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아이를 갖기 위해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던 올케가 어린 생명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눈이 시큰거렸다. 아이를 감싼 팔은 단단했고, 표정은 부드러웠다. 미래의 엄마는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반면 아이의 눈에는 불안, 경계,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생모의 자궁에서 몸으로 익힌 감정들. 그 눈을 보니 공개 입양 스토리를 연재하는 어떤 이의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입양아의 사진이 떠올랐다. 순간 ‘이런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 편협한 생각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사진에 대한 내 해석은 올바른 것일까? 나는 조카가 될 아기의 얼굴을 보며 내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편견’과 마주쳤다. ‘아이를 버린 부모’라며 친부모를 집단화하고, ‘버려진 아이들’이라며 입양아를 동질화했다.


그 좁고 단단한 생각이 두렵다. 창피한 마음에 가족이 되는 ‘과정’이라 변명해 본다. 그리고 이 지독한 생각의 뿌리를 찾아봤다. 한 지인의 이야기다.




지인 부부가 약물 중독자의 자녀를 입양했다. 그들은 약물 중독자 가정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방치되어있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그 집에 두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비위생적인 집안 환경, 불규칙적인 식사, 약물에 노출된 환경, 부모의 방임. 부부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긴 설득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 그들은 한 가족이 됐다. 장성한 친자식들도 새 동생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행복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된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고, 방황은 결국 가출로 이어졌다.


집을 나간 아이는 열일곱 살에 임신을 했고, 약물 중독자가 되었다. 친부모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유전자와 혈통’에 대한 나의 근거 없는 편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지인이 열일곱 살짜리 딸이 낳은 아이 즉 자신의 손자를 또 입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끝없는 믿음과 애정 그리고 노력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캐나다에 정착한 후 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접했다. 서양 사회는 한국에 비해 재혼 부부와 한부모 가정의 비율이 높다. 부친 혹은 모친이 연인과 동거를 하며 함께 아이를 양육하기도 하고, 각각의 자녀들을 데리고 재혼한 부부가 둘 사이의 아이를 낳아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도 한다.


입양을 통한 가족 구성도 일반적이다. 미혼자가 자녀를 입양하는 것도 가능하고, 동성 부부의 입양도 허용된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이상한 가족이 아닌 ‘정상적인’ 가족으로 인정받는다. 입양 가족이 내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족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혈연에 집착하고,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이민자라는 내 신분이 뼛속 깊은 한국인의 가족주의를 더욱 강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나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가족이 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라 생각해 본다. 입양을 반대하던 모친은 아들의 눈물에 백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시큰둥하지만 싫다고 하지는 않으신다. 나는 꼬물거리는 아기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우리는 조금씩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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