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족 이민자들의 자구책, 유언장
오늘 유언장을 작성했다. 내 나이 46.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인 듯싶지만 ‘이민자’라는 특수한 신분이기에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지난여름, 내가 거주하는 C마을의 한 한인 사업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의 빠른 대처로 생명에 지장은 없었으나 의식 불명이었다. 간혹 의식이 돌아오기도 했으나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한 달간 사투를 벌이다가 그는 결국 사망했다. 남겨진 유족은 미망인과 어린아이 둘. 그의 나이 이제 겨우 마흔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몇 년간 지속적으로 생각해왔던 ‘유언장 작성’을 실행에 옮겼다. 실행이 늦어진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미성년자인 아이들 대신 유산을 관리해 줄 마땅한 후견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친인척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큰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초기 이민자의 가족 형태는 대부분 부부와 미혼 자녀들로 구성된 핵가족 혹은 소가족이다. 이들이 타국에서 대를 이어 직계 가족을 형성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아니 견뎌내야 한다.
10년 전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사고 전화를 받았다. 곤히 잠들어 있던 첫째를 깨워서 차에 태우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당시 나는 임신 7개월이었다. 구급차 1대와 소방차 2대가 쏟아내는 경광등 불빛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캐나다에 아이들만 남겨졌을 경우에 누가 내 어린 자식들을 돌봐줄 것인가. 혼란에 빠진 아이들 곁에 있어 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삼촌도 고모도 모두 한국에 있다. ‘이 광활한 땅에 오직 우리 넷뿐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수록 불안은 점점 짙어졌다.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캐나다 상속법에 대해 알아봤다.
캐나다의 상속법은 주마다 다르다. 내가 거주하는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단 상속세는 없다. 상속 과정에 대한 수수료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금이 전혀 없는 없는 것은 아니다.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할 때 개인 소득으로 신고되면서 그때 세금이 부과된다.
문제는 상속 과정이다. 유언장이 없을 경우 상속 과정이 아주 복잡하다. 우선, 캐나다 법원이 지정한 ‘유산 집행인’이 상속 과정에 개입한다. 개인 사업체를 운영할 경우에는 상속 전에 사업체에 대한 세금 조사가 진행된다.
유언장이 없을 경우, 부모 중 한 명이 생존해 있어도 미성년 자녀의 상속 지분은 ‘공공 후견인’이 관리감독하게 된다. 유산 분배가 이루어지기까지 짧게는 8개월에서 길게 2년까지 소요되고 이 시기에 모든 자산은 동결된다. 유산 집행인과 공공 후견인에 대한 수수료도 지불해야 한다.
반면에 유언장이 있을 경우에는 훨씬 단순하다. 법원이 유언장의 유효성을 확인한 후 바로 상속자산의 명의 변경, 분배가 가능하다.
유언장 작성 시 변호사 비용이 개인당 약 500달러 정도다. 내가 아직 젊고 건강한데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유언장 때문에 이 금액을 지출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또 내 발목을 잡았었다. 그러나, 지난여름 남편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을 고인의 가족을 생각하다 결국 유언장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유언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유언장.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나는 유언장을 작성하며 내 인생을 정리하고 남겨진 이들에게 애정과 감사를 전하는 중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변호사로부터 건네 받은 유언장은 어떤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하나의 ‘공공 문서 양식’이었다.
모든 과정이 끝났다. 사람들은 내게 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 기우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유언장이 40년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40년 동안 나는 내 마음에 보호막을 만들어 놓았다. 왠지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