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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밀리 Jun 04. 2021

9. 기혼여성들의 26시간 제주 여행일기

누구보다 엄마가 되고 싶은, 돌고래를 만나고 싶은 우리의 즐거운 이야기

언젠간 웃으며 돌아볼 난임 이야기입니다. 저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라면 경험을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싶습니다. 주변에 난임을 겪고 있는 이웃의 지인 분이라면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소중한 생명을 기다리는 모든 분들의 임신 성공을 기원합니다.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마치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번 남편과 다녀온 여행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이지만 이번엔 꼭 가야만 했다.


2년 전부터 여행을 가자고 친구들과 매월 조금씩 모아둔 돈이 200만원이 훨씬 넘게 모여있었으나 아이가 있는 친구 두 명은 육아로 인해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아이 있는 엄마들에게 '여자친구들만의 여행'은 아이 병원, 가족 행사, 부부 모임, 심지어 시부모님 결혼기념일에 이어 늘 마지막 순서로 미뤄져 왔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적극적으로 꼭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달에 시험관 시술을 진행할 것이고 이번엔 꼭 임신을 할 테야(내 마음대로 된다면야!). 그러니 이번 달에 우리는 미뤄왔던 여행을 꼭 가야만 해! 이번에 가지 않으면 난 이제 못가! 아니 안가!"라고 외쳤고 친구들은 결의에 찬 나를 핑계 삼아 각자 집안 사정을 뒤로한 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행지를 고르는데도 한참을 고민했다. (코로나 때문도 있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때 돌아올 수 없는 해외는 안될 것, 너무 먼 여행지는 몸이 피곤해서 안될 것, 너무 가까운 곳은 오랜만에 쟁취한 자유시간의 기분이 나지 않으니 안될 것 등등 장소 선택부터 난관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시간만 보내다 떠나기로 한 날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번에도 취소되는 것인가'하며 씁쓸해하던 찰나에 채팅방에서 갑자기 젊은 날의 '그냥 떠나자! 고고'를 외쳤던 열정이 되살아났다. 속초-양양-부산-가평-서울(호캉스)-인천-춘천을 지나 우리는 결국 맨 처음 말도 안 된다며 포기했던 제주도를 가기로 결정했다.  


이제 마지막(?)이니 술도 진탕 먹어야겠다! 결심했었는데 여행 전 생리를 시작으로 찾아간 산부인과에서는 시험관 시술에 앞서 항생제를 처방해 줄 테니 술을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냉장 보관된 자가 배 주사를 꼭 맞으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엽산, 영양제, 항생제가 든 약봉지와 보냉팩에 담긴 주사기로 가방의 반을 채운 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26시간 제주 여행기>

오늘은 난임을 떠나 편하게 여행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급박한 여행 계획으로 예약을 하다 보니 비행기 자리가 없어 첫째 날 아침 일찍 출발하고 둘째 날 일찍 서울에 도착하는 26시간의 여행 일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은 피곤했지만 (집에서 제대로 된 밥도 안- 아니 못 먹어서 나를 기다릴 남편과 2시간마다 영상통화 속 엄마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며 엄마 언제 와를 외치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들의 일정으로는 아주 적절했던 여행인 것 같다.


좋은 음식 먹기 without 알코올 한 모금

1박 2일간의 일정 중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날 아침/점심/저녁/카페2회과 둘째 날 아침이었다. 둘째 날은 호텔 조식을 먹기로 했으므로 첫째 날 음식만 골라 먹으면 되었다. 제주 여행을 여러 번 와본 우리는 웬만하면 먹어보지 않은 제주 특산물은 없었으므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선택했다.

<보말칼국수, 보말죽, 보말전@보말명가:제주시 흥운길77>

첫날 아침식사는 보말칼국수와 죽으로 시작했다. 보말이 우러난 걸쭉한 국물과 아삭한 김치를 함께 곁들여먹으며 몽롱하게 시작한 아침의 허한 속을 채웠다.

보말이 들어간 제주산 미역국이 서비스로 나와 한 그릇을 완뚝했다. 미역국은 임산부나 출산 후에도 여자에게 좋다는 소리를 들어 어디 가든 미역국만 나오면 귀한 보약이 나온 것처럼 후루룩 마신다. 쉽게 구할 수도 있고 끓이기도 쉬워 고마운 음식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점심은 아쉬운 마음에 무려 두 끼를 먹었다. 첫 번째는 친구가 찾아낸 멋진 버거집에서 제주산 당근과 시금치가 들어간 건강하고 맛있는 버거를 먹었다. 가격도 다소 비싸고 의자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세련된 가게 인테리어에 액자 같은 통창으로 보이는 제주바다는 모든 단점을 커버할 만했다. 옥빛 바다색을 보며 먹는 당근 버거는 내가 당근을 참 좋아했구나라고 입맛조차 착각하게 만들었다.

<당근버거, 시금치버거@무거버거:제주시 조천읍 조함해안로356>

두 번째 점심은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들어가 회국수와 한치물회를 먹었다. 두 번째 점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웃기듯이 우리 역시 생각해보지 않았다. 우연히 지금이 한참 한치가 제철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운전자인 나의 특권에 따라 그대로 길가에 보이는 회국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회국수, 한치물회@동복리해녀촌:제주시 구좌읍 동복로33>

쫄깃한 회가 뭉텅뭉텅 들어있는 매콤한 회국수와 시원 새콤한 한치물회를 국물과 함께 호로록 마시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이제 임신을 하면 날 것을 못 먹을 테니 제철 회도 못 먹겠지. 지금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먹어 둬야겠다 하는 나의 개인 욕심으로 시작됐지만 '배고프지 않은데..?'라며 두 번째 점심을 의아해하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함께 맛있게 먹었다.

<흑돼지 삼겹살, 목살@저팔계깡통연탄구이:제주시 조천읍 신북로531>

마지막 저녁식사는 늘 그렇듯 흑돼지를 먹었다. 슬리퍼를 신고 걸어 나와 두툼하고 (조금 징그럽기도 하지만) 까만 털이 박혀있는 흑돼지 삼겹살을 시켰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가격이 조금 올랐지만 제주여행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관광지임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괜찮았다. 회비로 모아둔 돈이라 먹고픈 건 다 먹고 하고픈 건 다 해버리는 여행이었다.

오랜만이니 회포를 풀어보자! 했지만 나는 (시험관 준비로)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친구들은 술을 잘 못 마셨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을 시켜 소주는 1/3병을 겨우 먹고 맥주는 반병을 그대로 남겼다. 그리고 취한 거 같다며 남은 술은 가방에 넣어두었다. 우리의 어이없는 주량에 다시 한번 웃고 지난 몇십 년간의 추억을 되새기며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다.


"띠링띠링~!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


잠시 잊고 있던 주사맞기 10분 전 알람이 울렸다. 시간이 애매해 냉장고에서 주사를 따로 챙겨 오지 않았었다. 하긴 챙겨 왔더라도 처음 스스로 놔보는 주사를 낯선 화장실에서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돌아다닌 탓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어두운 골목 화장실에서 주섬주섬 옷을 들춰 제 몸에 주사를 놓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청정지역 제주도가 할렘가 뒷골목이 될 것 같았다.  


고기도 얼추 다 먹어가던 참이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숙소로 내달렸다. 10분 안에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숙소의 멋진 조명들을 보며 처음으로 자가주사를 진짜 '자가'로 맞았다.

다행히 많이 아프지 않았다. 주사라면 덜덜 떨지만 혼자서도 잘 해냈다.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맞는 '고날에프'는 가장 아프지 않은 주사라고 한다. 용량도 많지 않고 펜 형태로 주사 맞는 방법도 편리하니 다행이구나. 오늘도 한 가지 과업을 해낸 것처럼 나 자신이 대견했다.


주사를 맞은 뒤 소파에 앉아 한숨 쉬고 있으니 친구들이 마트에서 과자와 맥주 한 캔(결국 안 먹고 집에 가져갔다)을 사 왔다. 다시 한번 과자를 먹으며 육아의 고충과 동시에 육아의 기쁨에 대해 토론했다.  

 

좋은 곳 미리 기억해두기

제주에는 좋은 여행지가 많다. 지도에 나와있거나 유명한 곳이 아니더라도 방문하는 곳곳이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는 바닷가 앞 카페도 그렇고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맑고 깨끗한 모든 바닷가 해변이 그랬다. 특히 여름엔 수국 꽃이 참 예쁘다고 한다. 제주는 해안이든 숲길이든 드라이브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돌고래를 보고 싶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로 돌고래 요트투어를 급하게 예약했다. 한 달에 네다섯 번만 출석한다는 돌고래는 보지 못했지만 신나는 노래와 함께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니 속이 시원하고 걱정거리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임신(난임), 출산, 육아 모든 걸 잠시 잊고 별거 아닌 걸로 웃고 떠들던 어린날의 나와 우리로 돌아갔다.

<여기서도 난 사과쥬스>
<나타나라 돌고래야! >

짧은 일정으로 인해 숙소를 공항 근처 함덕해수욕장으로 잡았다. 숙소 앞바다가 깨끗한 에메랄드빛이기도 하고 숙소와의 거리도 가까워 가족들이 여행 오긴 딱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한참 사진을 찍으며 노는 동안 그 옆에서 오동통한 수영복을 입고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지금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도 정말 행복하지만 언젠간 나도 귀여운 아이들을 데리고 이 바닷가에 다시 놀러 와야지. 아이들과 모래놀이도 하고 물놀이도 하는 그날도 참 행복하겠다고 멀지 않은 미래를 그려보았다.


낮에 다녀온 돌고래 요트투어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참 좋아할 것 같다. 그땐 꼭 돌고래를 볼 수 있기를. 지금 행복한 시간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의 아이들과 놀러 와 이 아름다운 제주도를 함께 기억하고 싶다.

그냥 친구들과 함께한 26시간의 제주 여행 이야기를 적으려고 했는데, 결국 지금 내 인생의 모든 것은 난임극복과 임신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어쩌겠나. 이것이 지금의 나인 것을.


좋은 것을 먹으며 내 몸을 관리하고 좋은 곳을 보며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웃고 즐기며 웃음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친구들은 약 시간에 맞춰 물도 챙겨주고 주사 시간을 배려해줬다. 돌하르방의 코를 한번 더 만질 수 있게 같이 찾아봐주었고 아이는 꼭 생길 것이니 걱정 말라고 (자신들의 현실적인 육아 고충과 함께) 토닥여주었다.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임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나에게 함께 응원해주고 예쁜 말의 힘을 보태주는 친구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언젠간 내 글들이 난임을 극복하고 10개월 간의 임신 일기, 고달프지만 행복한 육아 일기로 채워지는 그날을 기대하며 이번에 진행하는 시험관 시술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돌고래를 우연히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오늘은 보지 못했지만 돌고래는 분명 바다 안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갑자기 바다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도 해요.

돌고래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면 눈 앞에 돌고래만 찾기보다

찾으러 떠나는 그 여정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요트를 타고 바닷바람을 쐬고, 음료수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낚시도 하는 그 여정도 꽤 재미있더라구요.

바닷속에 돌고래는 분명 있어요.

오늘 보지 못했다는 것이 '실패'는 아니에요. 즐겁게 다녀왔다면 그 여행은 '성공'인 거죠.

언젠가 꼭 찾아올 임신 성공을 준비하며 오늘의 소중한 하루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즐기며 성공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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