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anii Jul 09. 2017

불성실한 생활일기

20170709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일어나는지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것이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으로 겪은, 단순히 집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활이 근거가 바뀐다고 할 만한 일은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로 직장을 구해 올라왔을 때였다. 친구의 언니가 소개한 어떤 건축회사의 사장 비서로 취직이 되어 고향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로 왔다. 소지품이 든 가방과 엄마가 싸준 이불 가방을 양손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터미널인가로 마중을 나왔던 친구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자같다고 놀리기도 했는데, 사실 야반도주를 하지 않았다뿐이지 돌아갈 기약없이 낯선 곳으로 살러온 처지라는 점에서는 뭔가 더 나은 상황도 아닌 것이다. 가방 두 개로 시작한 서울 생활 1년 남짓 후 그동안 얹혀 살던 친구집을 떠나 노량진의 허름한 월세방에서 혼자만의 자취를 시작했는데, 이 때는 그래도 짐이 좀 늘어 있어서 밥솥과 브루스터 같은 부엌 살림과 함께 이사를 했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그 월세방에서의 1년이 지난 후 다시 이사를 할 때는 친구의 자동차를 빌려 짐을 날라야 했으니까 그 사이 또 짐이 늘었던 게 틀림없다. 그로부터 10년 넘게 서울에 자리잡고 살다 보니 '내 것'이라 할 만한 것들이 늘어나고 또 늘어났다. 책이며, 음반이며, 그림, 옷가지, 책상과 책꽂이 그리고 그 밖의 살림살이들. 그런 것들을 껴안고, 또 늘려가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2010년 한국을 떠나려고 보니 내 것들은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낡고 쓸모 없는 것들은 버리거나, 재활용품으로 분류하고, 또 필요로하는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애써 모은 책이나 음반이 주로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것들을 박스에 싸서 도시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물품 보관 서비스에 맡겼더니 10박스도 넘는 분량이었다. 그나마도 3-4년이 지나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기에 다시 박스에 담아 후배집으로, 또 다시 친구집으로 보내는 지난한 과정 끝에 1년 전에야 모든 물건을 처분했다. "이건 절대 못 버려"했던 하이쿠 전집이라던가, 대학때 할부로 샀던 서양미술 화보집. 좋아하는 작가는 모든 책을 다 사모으는 습관대로 빼놓지 않고 사모았던 하루키나 코엘료, 폴 오스터의 책들. Korea Foundation에서 제3세계 음악 강좌를 들은 후 샀던 남미나 아프리카 음악 CD들. 결국 모든 것들이 각자의 갈 곳으로 사라져갔다. 그 때 앞으로 다시는 이런 것들을 모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인도에 살면서는 책이나 음반을 사서 모으기가 쉽지도 않아서 가능한 E Book을 보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끼는 책도, 그림도, 의미있게 선물받은 물건들이 생기고 말았다. 지난 4월 인도 생활을 다시 정리하려니 또 다시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는 물건들 투성이였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니 새삼 다시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는 전보다 쉽게 마음 주었던 물건들과 이별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의 인연이 다 한 것이야'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여전히 다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인도에 남아 있지만 이번에는 고작 한 박스에 불과하다. 내가 가게 될 곳이 결정되면 보내주기로 하고 남겨놓은 것이다. 지금 사는 서울 집에도 조금씩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제는 전처럼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언제라도 이별할 준비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굳이 규정하자면 "버릴 수 없는 물건은 소유하지 않는다"고 할까. 의미를 담은 물건은 그래서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한다. 거기 담길 뻔한 마음만 받기로 한다. 사람에게도 그래야 할지는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 다람살라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