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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Apr 26. 2020

평화학 공부하기@Innsbruck

모든 것을 통합하는 공간 Integrative Seminar

인스브루크 대학의 평화학 과정은 무척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의 페이퍼를 돌려가며 읽고 평가를 주고받는 크로스 리딩 Cross reading이나, 오스트리아 군대에 들어가 받는 현장 실습, 구급 훈련, 혹은 다양한 주제의 강의와 워크숍, 조별 활동이나 댄스 워크숍 등등 내가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다양한 방식의 교육이 존재했다.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본다면(실은 질문을 받기도 전에 내 입으로 종종 이야기하곤 했는데), 단박에 나는 통합 세미나 Integrative seminar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실은 이 세미나는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기도 하다. 무슨 말일까.


인스브루크 대학 평화학 과정 홈페이지(https://www.uibk.ac.at/peacestudies/ma-program/schedule/winter18-19/modul2.html.en#start)에 올라와 있는 매 학기 스케줄에는 The obligatory Integrative Seminar will be held every Wednesday라고 적혀있다. 매주 수요일에는 필수적인 통합 세미나가 열린다는 말이다. 학교에 실제로 가기 전까지는 이 통합 세미나가 대체 뭘 말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한 지 4일째 되는 날, (매 학기 학생들은 일요일에 도착해서,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강의에 참석해야 한다.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매일 9시~12시, 2시~5시, 월~금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강의 스케줄에 따라 휴식을 갖거나 개인적인 일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절' 없다.) 첫 통합 세미나가 열렸다. 


시간에 맞춰 가장 넓은 강의실인 Saal Tyrol에 들어서자 그전에 있던 책상은 모두 치워지고 의자가 동그랗게 놓여 있었다. 모든 학생과 교수인 볼프강, 퍼실러테이터인 노버트를 비롯한 faculty 멤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해 놓은 것이다. 처음인 만큼 자리에는 각자의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이름이 적힌 자리에 가서 앉자 노버트가 종을 울렸다. 티베트 불교 의식에 쓰이는 작은 종이다. 그리고 이어서 볼프강이 이 세미나의 규칙을 설명해 준다. 통합 세미나는 매주 수요일 7시에 열린다. 참석이 의무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참석해야 하고, 빠진 사람이 있으면 올 때까지 기다린다.(그곳의 모든 강의는 대부분 그렇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타인을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각이나 결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가끔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만) 


세미나는 세 세션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는 학생-학생 시간이다. 학생들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혹은 그냥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감정, 개인사,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다. 말로 하기 어려우면 춤을 추든 동작을 하든 누구도 제지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을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는데 누구의 눈치도 방해도 없이, 부정당하거나 지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의 힘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발언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발언을 듣는 사람들의 공감하는 태도와 인내심이 필수적이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종종 학생들은 이 통합 세미나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 the safest space이라고 불렀다. 두 번째는 학생-교수의 시간이다. 학생들은 볼프강을 비롯한 교수진에게 감사도, 불만도 이야기할 수 있고, 수업에 관한 건의도 할 수 있다. 혹은 좀 더 사적인 감정을 표시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2주씩 진행되는 각 모듈에 초청된 외부 강사진도 참석해서 이야기를 공유한다. 이때는 대부분 교수진의 배려와 강의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주를 이루곤 했다. 솔직하게 감사의 감정을 표시할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이 내게 퍽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는 조교인 사브리나가 주로 다음 주 일정에 관한 공지를 하는 시간이었다. 가장 학사 행정에 가까운 시간이고 이 시간이면 이제 마무리가 된다는 뜻이다. 


매 세션은 제한된 시간이 없이 진행되고, 더 발언할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볼프강의 세 번의 콜을 거친 후에 노버트가 다시 종을 치는 것으로 세션이 끝난다. 제한된 시간이 없다 보니 학생들 간에 이슈가 많거나 군대에서 진행되는 Native Challenge처럼 감정적 소모가 극심한 프로그램을 한 후에는 한없이 세미나가 이어졌다. 가장 길게 진행된 날은 학기 마지막 날 기록했던 5시간 반이었다. 지친 학생들이 졸기까지 하면서도 누군가 발언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말 그대로 그 장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것을 종종 우리는 holding space라고 표현하곤 했다. 


발언이 진행되는 데에는 규칙이 있는데, 먼저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든다. 그러면 일종의 진행자인 볼프강이 지목해 발언권을 준다. 여러 사람일 경우 순서대로 발언을 하도록 정리해 준다. 그 사람의 발언이 끝나면 다음 순서인 사람이 발언을 해야 하지만, 만약 그 발언에 이견이나 덧붙일 말이 있는 사람은 양손 검지 손가락을 번갈아 흔든다. 그러면 원래 다음 순서를 기다리게 하고 그 사람에게 발언권이 간다. 단, 이때 발언은 앞사람의 발언에 대한 응답에 제한한다. 어떤 사람의 발언에 공감을 표시하고 싶을 때는 손을 펼치고 머리 옆에서 흔든다. 많은 사람이 그런 동작을 보이면 그만큼 공감을 얻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전 과정에서 교수진은 거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을 했을 경우를 제외하고. 철저히 학생들의 시간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규칙이 무척 어색했지만 나는 금세 적응하게 되었다. 다만 내가 첫 학기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4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영어로 말하는 일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고, 사소한 것이라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유럽이나 남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이런 걸 말해도 될까?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라는 일종의 자기 검열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자리는 정말 어떤 이야기도 가능한 곳이었다. 


평화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평화로운 이야기만 오고 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너무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판부터, 자신과 감정이 안 좋은 다른 친구에 대한 불만, 거기에 대한 응답,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한 친구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하는 일까지 말 그대로 별의별 일이 그 자리에서 벌어졌다. 나의 첫 학기, 첫 통합 세미나에서는 한 학기 선배가 자신의 성적에 대해 질문을 했고, 볼프강이 성적이 산출되는 기준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그는 성적에 만족할 수 없다며 한 시간 가까이 질문을 이어가 신입생들을 모두 질리게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매우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이어서 나는 룸메이트였던 3학기생 나마라에게 질문을 했는데, 그녀는 그게 통합 세미나라고 답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모든 일을 포용할 수 있는 자리.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불만도 존재하지만 결국은 그 자리를 통해서 답을 찾아가고, 갈등을 빚었던 상황을 함께 변화시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감동을 받았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통합 세미나라는 말을 (바로 그 통합 세미나에서) 하게 되었는데 많은 친구들이 손을 펼치고 머리 옆에서 흔들어 주었다.(동의를 표해 주었다는 말씀!) 통합 세미나야말로 인스브루크 대학 평화학 과정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리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함께 전환(transform)해 가는 그 시간. 매 학기 수요일마다 열렸던 그 자리를 기억해 보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서로를 위한 안전한 자리를 만들고 함께 지켜내는 것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자리, 그런 공간을 나는 앞으로 내 삶에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자문과, 그렇게 해내고 싶다는 결심이 동시에 스치고 지나간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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