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듣기 Active Listening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최근 읽은 한병철의 책 '타자의 추방'에 나오는 글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했던 적극적 듣기 Active Listening이 떠올랐다. 그곳에서의 대부분의 경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온 뒤에야 회복적 생활 교육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쓰이는 기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인스브루크의 적극적 듣기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말 그대로 '듣기'만 한다는 점이다.
학교에 도착한 첫날, 정식 수업이 시작되기 전날인데, 이날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에 대한 강의 비디오를 시청하게 된다. 다행히 그의 책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수업을 포함한 일상생활에서 관찰-느낌-욕구-부탁이라는 비폭력 대화의 방식을 과연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첫 번째 워크숍에서 표현하기, 적극적 듣기, 표현하기가 시작되었다. 볼프강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의자에 앉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한 사람은 그 곁에서 두 사람을 관찰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그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라도, 어떤 주제라도, 심지어 어떤 언어로도 말하는 것이었고, 맞은 편의 다른 한 명은 그 말을 온몸과 마음으로 듣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둘 사이에 무엇이 오고 가고 생겨나는지를 관찰했다.
아직은 환경도, 친구들도, 영어로 듣거나 말하기까지 모두 어색하고 불편했던 내게 처음부터 쉽지 않은 워크숍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의 말하기 순서에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몇몇 친구들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고, 나보다 한 학기가 앞선 데다가 유일하게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던 소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진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내가 한 이야기는 이 멀고 먼 곳에 내가 어쩌다 와 있을까에 대한 두렵고 혼란한 마음이었다. 당연히 전혀 뜻이 통하지 않을 나의 한국말을 적극적으로 듣고 있던 소피와 우리 둘을 관찰하던 라리사의 진정 어린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펑펑 울고 말았고, 두 사람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처음 경험한 적극적 듣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 듣기는 우리 학교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매일의 프로그램이었다.(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인스브루크 대학 평화학 프로그램은 매일 아침 9-12시, 2-5시 진행되며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같은 시간이 이어진다. 이때 아침 9시에 모든 학생들이 한 강의실에 모여 조교인 사브리나의 진행에 따라 10여 분간의 적극적 듣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 경험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세 명이 아닌 두 명씩 짝을 짓게 되는데, 이때의 파트너는 학기 첫날 결정되어 학기 내내 같은 사람과 하게 된다. 나의 파트너는 소피-아드리안-다니엘 이렇게 세 명이었다.(3학기니까...) 세 사람 모두 스타일이 달랐고, 나 역시 선호도가 달랐지만 모두 다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열고 들으려는 자세만은 같았다.
이렇게 진행되는 적극적 듣기를 하는 시간은 각각 5분으로 이때 말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은 어떤 말도, 리액션도 할 수 없게 돼 있다. 말 그대로 듣기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로지 할 수 있도록 허용된 말은 "Thank you"였다. 나에게 말해주어 고맙다는, 적극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인스브루크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하듯이 적극적 듣기를 할 때도 허그는 많이 나누었지만 절대 다른 말은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적극적 듣기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일상생활에서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극적 듣기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은 그만큼 내밀하고, 그래서 지켜주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은 그 시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하지라고 의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순간 생각나는 이야기,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말했고, 들었다. 말할 때는 재고 따지지 않고, 들을 때도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고. 그렇게 매일 아침을 시작하다 보면 누군가가 나를 들어주는 일의 힘을 느끼게 된다. 어디선가는 웃음을 터뜨리고 그만큼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뒤섞여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털어놓는 시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시간. 이 시간을 너무나 좋아한 친구들도 있어서 방학 중에 만날 수 있는 친구들끼리 따로 만나서 적극적 듣기를 하기도 했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에게 조언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했다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상시엔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가까운 사이였던지 나도 모르게 선을 넘었다. 그때 '아, 이 친구가 나에게 원한 것은 그냥 들어주는 것이었을 텐데' 싶었다. 적극적 듣기를 너무 오래 안 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다시 연습해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