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anii Aug 08. 2022

고독한 책읽기-7

저만치 혼자서 / 김훈

한때는 특정 작가의 작품은 출판이 되기만 하면 사서 읽었다. 그 목록에 들어 있던 작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 파울로 코엘료, 김연수 그리고 김훈 등이었다. 김훈 작가는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이고, 기자 출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빼어난 르포를 쓰기도 했지만 내가 그의 팬이 된 것은 '자전거 여행'이라는 그의 기행 수필집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문장은 이전까지 내가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글은 여전히 연필로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그의 행위와 닮아 있었다. 꾹꾹 눌러쓴 문장, 마음에 떠돌던 문장이 지면에 옮겨지는 생생한 느낌. 그것은 그가 '자전거 여행'에서 언급한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메스너가 등반 전날 짐을 싸며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차마 물러서지 못하는, 그렇게 나아가지만 "가닿지 못하는 아득"함이 껴지는 글이었다. 그렇게 김훈을 알게 되었고 그의 책을 모두 찾아 읽었으며, '자전거 여행'은 족히 열 권 정도는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수필이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시나 소설보다 못해 보일 때가 많지만, 나는 종종 수필을 통해 작가의 문학세계가 완성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내게는 '자전거 여행'이나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을 때, 김훈의 심정에 일체가 되고, '먼 북소리'를 읽으며 하루키의 시선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에 대한 열렬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점차 유통기한을 다하고 나의 독서 세계에서 멀어져 갔다.(지금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책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인데, 이 작가의 책은 딱 이것밖에 읽지 않았다. 그러니 멀어지고 말고를 논할 수가 없다.)


나의 필독 작가 목록에서 가장 먼저 탈락한 이는 폴 오스터였고, 인도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Adultery'를 읽고 '이제 코엘료의 책은 그만 읽어도 되겠다'라고 느꼈으며, 실은 김훈 작가의 책 역시 '남한산성'이 영화화된 이후 손을 놓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문장이 화면에 온전히 옮겨지지 않을 거라는 추정,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그의 아득한 문장에 대한 지겨움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접했을 때 놀라움을 주었던 그의 문장들이 언젠가부터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게다가 인도에서 사는 동안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들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좋아했던 작가들의 신작을 찾아 읽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문학책과 한동안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글을 읽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좋은 글을 읽고, 쓰고 싶다는 욕심. 논문을 쓰는 동안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던 읽는 글 말고, 형광펜을 손에 들고 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는 글 말고, 마음에 줄을 그어가며 읽는 글이 읽고 싶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려 하니 내가 기억하는 작가들은 사라지고 없고, 새로운 작가들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훈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펼치면서 내심 익숙한 문장을 만나리라는, 어느 정도 검증된 수준의 글을 읽게 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검증되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문학적 수준이 아니라 나의 취향에 맞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시나 내가 기억하는 김훈의 문장들이 있었다. 산다는 것,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어떤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바스러지는 인간들에 대한 애정, 혹은 연민 같은 것들 속에서 김훈은 종종 길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길을 잃고 다시 찾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책의 글들은 모두 과할 정도로 냉정하고 건조한데, 그 아래에는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뜨거움을 감추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가끔은 그의 글이, 아니 어쩌면 그가 위악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사실에 근거해서, 혹은 작가의 취재와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것이 위악이 아니라 고행이나 금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라고 적었다. 폭력이나, 희생이나, 역사라는 단어를 적지 않고 쓰인 한 사람의 이웃의 이야기들. 마지막 장을 덮고, 언젠가 평화수업에서 이 글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평화학 공부하기@Innsbruc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