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중요한 뉴스를 하나 전하려고 한다.
지난 일요일 콜롬비아에서 대선이 있었다는 사실.
그게 뭐 중요한 뉴스냐고?
좀 더 들어보시라.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라는 좌파 성향, 게릴라 출신의 정치인이 콜롬비아의 새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와 가깝지도 않은 남미에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누가 되었든 무슨 상관일까.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남미 대륙에 지난 2011년부터 좌파 바람이 불고 있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지금도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에서는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정권을 잡고 있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어쩌면 그 나라들이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그 정권들의 탓이 아니겠냐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에 핑크 바람이 불어도 늘 우파 정권을 유지하던 콜롬비아에서 최초로 좌파 성향의 정치인이 당선되었다니 호기심이 생겼다.
남미에서도 미국과 가장 친한 나라, 좌파 혹은 개혁 성향의 정치인이 대선에 나오기만 하면 무자비하게 처리되는 나라, (정치적으로 사장된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죽는다, 콜롬비아에서는. 1948년, 1989년, 1990년, 1995년 대선에 출마했던 후보들이 대부분 선거 기간 동안 살해당했다) 그런 콜롬비아에서 좌파 성향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콜롬비아는 Blanco, 그러니까 백인 혈통, 보고타 출신의 엘리트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 아니었던가?
페트로라는 인물의 프로필은 대략 이렇다. 좌파 게릴라 단체인 M-19 출신의 경제학자, 1991년 이 단체가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출해 하원위원이 되었고, 수도인 보고타 시장과 상원위원의 자리에도 올랐지만 정작 대선에서는 두 번이나 탈락했던 인물.
대통령 당선자도 그렇지만 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 프란시아 마르케스(Francia Marquez)라는 인물도 화제가 되고 있다. 아프리카 혈통으로 콜롬비아 내에서도 비주류이고, 미혼모이자, 가정부로 일한 경력까지 있어 한국의 언론들은 그런 그의 배경만을 부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흑인 여성이라는 것 외에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한다는 사실, 광산에서 일하다가 강을 오염시키는 금 채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수많은 소수부족 사람들과 연대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은 소개하지 않는 듯하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어쩌면 기권표로 남았을 많은 소외 계층의 표를 결집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아무튼 두 사람의 배경과 각자의 프로필도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지만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페트로 당선자의 파격적인 공약 내용이었다.
페트로의 파격적인 공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석탄, 석유 산업을 점차 '소멸' 시키겠다는 계획, 코카인 재배와 벌목을 막겠다는 계획, 농지 개혁, 연금 개혁 등 콜롬비아 국민들이 자국의 어떤 변화를 소망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약들이다. 마약, 마피아, 폭력, 아마존 원시림 파괴, 빈곤 등 콜롬비아가 해결해야 하는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저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들에 페트로는 자신의 공약을 통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여러 공약 중 에너지와 관련한 공약은 단연 파격적이다. 파격을 넘어 허황되게 들리기도 한다. 페트로는 앞으로 더 이상의 유전 개발을 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수주된 기업들과의 계약은 존중하겠지만 자신의 임기 동안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못밖았다(5월 19일 미국 투자자들과의 회의 중). 페트로는 프랙킹(Fracking, 지하 사암층에 높은 압력의 액체를 주입해서 천연가스, 석유를 추출하는 방식. 지하수 오염, 토양 오염 등 환경오염을 야기한다)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도 하다.
허나 수출액의 10퍼센트 가까이 차지하는 석유 개발을 하지 않겠다니, 자원 국가가 자원으로 먹고살지 않겠다니? 그러면서도 연금, 교육, 복지, 빈부격차 등 엄청난 돈이 필요한 개혁들을 하겠다고 하니.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페트로의 공약이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가 코 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서, (2021년 4월에 발표된 IPCC 제6차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상승하는 시점을 2030년에서 2052년 사이로 예상한다고 하니, 정말이지 급박한 상황이다) 페트로의 에너지 개혁 공약은 이러한 절박함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절박함에 콜롬비아 국민들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며, 그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에 당선시켰다.(누가 콜롬비아를 후진국이라 폄하할 것인가)
페트로 당선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가치는 평화, 그리고 녹색 에너지로의 전환이다. 여느 선진국의 대통령 당선자도 아닌 그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리더십으로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지구 전체가 당면한 급박한 사안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남미 인권 운동과 환경 보호를 지지해온 영국의 음악가 Roger Waters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는 선거 직전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페트로와 그의 정치 파트너 프란시아 마르케스에게 투표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12년 동안 콜롬비아는 정치적 탄압과 압제에 고통받았고, 미국은 우파 정권이 유지되도록 무슨 짓이든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국민들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 달라고 당부했다. 콜롬비아의 정치적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져 워터스 동영상 전문 https://www.youtube.com/watch?v=VjebjGOwmO8) 그의 따뜻하지만 강경한 목소리에서 평화와 인권을 생각하는 전 세계의 활동가들이 이번 대선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콜롬비아 민중들을 지지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페트로는 당선된 직후 하루정도 휴식을 가지고, 오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듯하다. 그가 처음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한 당사자들은 미국과 베네수엘라 두 나라이다. 그만큼 콜롬비아가 직면한 가장 큰 사안들과 얽혀있는 국가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페트로의 당선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을 미국과 페트로가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동등한(Igualdad, Tú y tú) 입장에서 관계를 이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미국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콜롬비아의 위치를 재정립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베네수엘라와는 지금까지 단절되어 있던 관계를 회복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협력 관계로 나아간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그러한 방향성에는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서로의 폭력 문제를 극복하고, 식량 문제와 관련한 상부상조의 길을 찾는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기후 위기와 식량 문제.
이 시대 모두가 당면한 이 두 사안을 이토록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는 지도자를 우리 대한민국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페트로가 제시한 개혁적인 공약들이 실현될 것인지, 정치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무마될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 가능성을 점쳐보기보다는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무엇이 필요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유의미할 것이다.
페트로 당선자와 관련한 뉴스들을 찾아보다가 대선 한 달 전에 있었던 토론회에서의 그의 발언을 듣게 되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잉그리드 베탄코트(Ingrid Betancourt)는 페트로에게 러시아 전쟁에 대한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고 몰아세웠다. 독재 국가인 베네수엘라와 친하게 지낼 것인지, 러시아, 이란 등 베네수엘라와 친한 국가들의 편을 들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었다. (페트로가 대통령이 되면 베네수엘라와 같은 모델로 나아갈까 걱정하는 여론이 있다. 페트로는 친환경 정책을 통해 석탄 석유 등 자원을 팔아 기득권층을 유지하는 베네수엘라와는 분명히 다른 노선을 갈 거라고 선을 그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왜 비난하지 않느냐, 혹시 러시아 편은 아니겠지?라고 몰아세우는 잉그리드 후보의 질문에 페트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에 관해 의견을 밝혀야 한다면, 나는 이라크를 침공하고, 리비아를 침공한 미국, 그리고 함께 시리아를 침공한 프랑스까지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편 가르기의 함정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유럽과 러시아의 지정학적인 충돌, 가스 자원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와 한편이니 콜롬비아는 나토의 편에 서겠다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 방식의 국제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는 평화를 수호하는 공간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정학적으로 얽힌 이해 당사자들이 제시하는 (편 가르기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짝짝짝...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토의 편이냐, 러시아의 편이냐. 정치적 편 가르기에만 치중한 우리들, 어느 편에 서야 우리에게 유리할까 저울질하기 바쁜,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은 못 본 체하고, 기회주의자처럼 이해관계만 따져 보았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평화를 생각하는 공간으로서 콜롬비아, 더 나아가 남미 대륙이 존재해야 한다는 페트로 당선자의 커다란 비전과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넓은 안목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겐 편 가르기를 넘어 정치가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치인이 있었던가.
그래서 저 멀고 먼 나라 콜롬비아의 새 대통령에게 반해 버렸다.
콜롬비아의 정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이루어 나가는지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어졌다. 한 나라의 이익과 경제 발전을 넘어 그가 그리는 전 지구적인 비전이 어떻게 구체화될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