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삼류
류근 시인의 작품 ‘진지하면 반칙이다’에서 ‘그리운 삼류’다.
나는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을 자처했다. … 내가 삼류여서 퍽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들 대부분은 일류도 이류도 삼류도 아닌 아류들이었다. 나는 참 속으로 그들을 몹시도 측은히 여기면서 경멸했다. 그것은 나의 소극적 유희였다. 나는 세상의 아류들과 한참을 잘 놀았다.
내가 삼류를 자처하자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사람들이 맨 먼저 나를 야유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나 있는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들이 조롱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나 있는 바보들이 나를 질시하기 시작했다. 너 삼류라며? 그러나 그들은 죽도록 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
나는 착하게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 술을 마시는 편이 한결 겸손해 보일 것 같았다. … 다행히도 내 애인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낑길 필요 없는 일류들이었다.
내가 삼류를 자처하자 내가 쓴 시조차 삼류라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의 시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나의 시가 삼류라고 주장했다. …
나는 세상에 와서 외로울 때 외롭다고 표현하는 일류들을 보지 못했다. 일류는 외로움을 다른 언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류는 최소한 자기 안의 외로움에게 독립된 주소지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 깃들어서 영혼을 축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맨날 외로움에 지고, 슬픔에 지고, 그리움에 지고, 상처에 지는 삼류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
시인을 자퇴하고 나자 이젠 삼류만 남았다. … 시끄러운데 들을 말이 없으니 아류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아류는 그래서 나를 슬프게 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일류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류는 세상을 지탱하는 사람들이다. 삼류는 세상의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다. 가장 만만한 자리에서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고 시다바리가 되고 삐에로가 되고 빵 셔틀이 되고 함부로 버림받는 가장이 되고 버림받는 애인이 되고 버림받는 선의와 호의가 되는 사람들이다. 유치하게도, 외로울 때 외로워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죽도록 어딘가 낑기고 싶은데 낑기지 못하는 아류들 따위와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세상엔 어떠한 정직한 정체성도 없이 소음과 오물만 지어내는 아류들이 넘쳐난다. 측은하게도, 스스로를 일류라 믿는 자들 가운데 아류 아닌 자들이 드물다. 삼류의 순정과 순수를 오독하고 모독하는 자들은 세상의 심각한 오염원이다. 그거슬 알아야 한다. 지옥의 한가운데는 위선자들과 돌대가리들과 아류들이 살고 있다고 성경에 적혀 있다.
외로울 때 외롭다 자각하고, 가끔은 표현하니 일류와는 이미 거리가 멀고,
심지어 그런 것에 영혼을 축내기까지 하니 삼류에 가깝다.
세상을 지탱하기 보다 내 맘대로 살기로 했으니 이류로부터도 멀다.
늘 버림받는 선의와 호의가 되는 사람이니 일류와 이류가 아닌 것은 눈물나게 확실하다.
연구개발의 순정과 순수를 내 정직한 정체성으로 삼고 있으니 아류는 아닐 것이라 기대해 본다.
류근작가가 가끔 쓰시는 시적 표현을 쓰자면,
기분이 별로다,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