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가벼운 마음, 가벼운 언어

by F와 T 공생하기

호주에서 1년 살기를 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만만치가 않다.


주택 계약 종료, 교통비 카드 잔금처리, 전력 차단, 호주현지 은행 접근 방법 등


한국에서의 경험이 적용되는 것은 단 하나, 사람일 모른다는 정도밖에 없어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것처럼 한국이 아닌 전 세계 어딜 가나 공통적일 것도 같다.

내 일을 세상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 역시 빼놓지 못할 듯싶다.


귀국일자를 정하고, 비행 편을 마련하고, 집을 빼야 되는 날짜 잡고,

전기, 통신 등의 계약을 종결하고 …


이 와중에 가장 많이 대화해야 하는 이는 부동산 중개업자(Property Manager)이고,

놀라운 것은 모두 법대로 한다는 것이다.


월세 계약을 하며,

4주 치의 담보금을 주정부에 내야 하고,

계약 종료 시

세입자가 주택을 원상 복구했음을 부동산 중개업자가 확인하고,

집주인 확인, 승인하면,

이 채권을 주정부가 다시 내게로 보내주는

시스템이다.


이때 세입자인 내가 원상복구를 하는 것에는 청소가 있는데

중계업자는 End Of Lease Cleaning (EOL Cleaning)을 했다는 영수증을 제시하기를 요구한다.

문제는 1년 살러 온 내가 EOL Cleaning이 무엇인지 알리 없다.

‘뭐 적당히 하면 되지 않나?’하는 마음인데

이것이 꽤나 비싸 100만 원에 육박한다.


그래서 이래저래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편지를 꽤나 많이 주고받아야 했다, 영어로.


와중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꽤나 귀찮구나, 적당히 좀 하지, 이 정도면 안될까? “ 뭐 이런 것들이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 말미에 ‘인사말’ (salutation)을 붙이는데

보통 ‘best regards’, ‘warm regards’ 정도를 쓰다가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실어 ‘regards’ 앞의 best, warm을 뺐다.

이것이 실제로 전달될 진짜 내 마음일지는 몰라도 상대에게 꼭 전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당시 단순히 무척 귀찮았다.


혹시나 해서 편지 인사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봤다.


ChatGPT에게 흔히 쓰는 영어 인사말 모두를, 감정에 따른 분류를 물었고,

혹시나 해서 ‘regards’는 어떤지 물었다.


‘아이고야.’


냉랭하고, 무신경하며, 문맥에 따라 소위 소심한 공격으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일면 제대로 전달되었으려나?

이만한 일로 내 온몸과 정신을 다해 공격성을 드러내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참 못났다.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 10~20만 원이 더 든다.

총비용의 꽤 큰 비율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기는 하지만 고작 이걸로 내 감정을 글에 담았어야 했을까?


이 못난 꼴로 남은 생을 버티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워 이 사실을 이실직고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의 도리를 알아야 하고, 도리에 맞는 생각과 행동, 말을 해야 하고, 배워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이왕이면 도리뿐만 아니라 품격이라는 것을, 미덕을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놀랐다.

내가 영어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무심코 단어 하나를 뺐을 뿐인데

실제로 내 감정이 담긴 의미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나 스스로 알지 못했던 능력이라니 …


모든 만남의 순간,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0.1초도 되지 않을 짧은 그 순식간, 우리는 동물적으로 상대의 기운과 자세, 태도에서 거의 대부분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내 감정 모두를 들켜버린 것이다.

동물이라 치면 이미 포식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후일 것이고,

인간으로 치면 조금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마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배고픈 갓난 아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하지,

간이 작아서라도 남에게 헤끼치며 살 마음은 없다 생각은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 놈의 가벼운 마음 씀씀이라니,

싫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이 뜨거운 가벼움.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