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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jActivity Dec 01. 2020

문명 직조의 씨줄과 날줄, 사상, 그 최전선의 이야기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대형 출판사들이 돌림노래처럼 찍어낸 저명한 저자들의 책과, 장사꾼들의 베스트셀러 마케팅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지금의 서점에서 서리한 논리와 기발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당대의 신서들과 조우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책이 없는 탓도 크다. 특히나 해외 학술 서적들은 국내 출판업계 여러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번역서가 나오기도 어렵거니와 번역이 되더라도 책이 그나마 좀 더 팔릴 것 같은 시기를 가늠하며 기다리느라 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기는 경우도 있다. 책에 소개된 25명의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의 저서 역시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기에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여러모로 크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은 철학, 인류학, 사회학, 과학, 미디어학, 지리학, 생태학 등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치열하게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고 있는 오늘날의 학자들을 소개한다. 첨예하고 도발적인 이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서구적 인간중심주의'(Humanism)로 대표되는 작금의 인류 문명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 사유의 핵심이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상정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탈인간중심주의’(Posthumanism)적 관점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직면한 다양한 위기의 양상을 집요하고 올바르게 고찰하여 사유의 전환점을 제시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


나의 변변찮은 소개보다 책에 소개된 학자들의 화두를 드러내는 25개의 질문들을 보는 것이 더 좋겠다.


브뤼노 라투르: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도나 해러웨이: 지구에서 어떻게 삶의 지속을 추구할 것인가?

메릴린 스트래선: 전체론으로는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는가?

프리드리히 키틀러: 매체는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바꾸는가?

필리프 데스콜라: 자연과 문화의 대립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나이절 스리프트: 도시는 물리적 관계로만 이루어지는가?

지크프리트 칠린스키: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애나 칭: 비인간 생물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은 어떻게 전 지구적 공동체의 바탕이 되는가?

캐런 버라드: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다루는가?

제인 베넷: 호수와 나무에도 법적·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가?

아네마리 몰: 질병은 어떻게 실체가 되는가?

세라 와트모어: 콩은 인간의 작물 재배와 소비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뱅시안 데스프레: 인간과 동물은 어떻게 함께 사유하는가?

볼프강 에른스트: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스테이시 앨러이모: 물질의 행위는 몸에 우발적 영향을 끼치는가?

브루스 브라운: 도시는 동물 없는 인간만의 공간인가?

캉탱 메이야수: 인간은 인간 이전의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가?

그레이엄 하먼: 인간과 비인간을 객체로 일원화할 수 있는가?

티머시 모턴: 지구 온난화는 자연의 문제인가?

에두아르도 콘: 생명은 어떻게 사고하는가?

웬디 희경 전: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통제와 자유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유시 파리카: 디지털 기기는 어떻게 지구를 황폐화하는가?

그레구아르 샤마유: 드론은 어떻게 전쟁의 전통을 교란하는가?

제이미 로리머: 지구의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자연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구 어디선가 오늘도 연구와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의 전회적인 사상들은 낯설고 난해하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독자에게 '다르게 생각해 보기'를 위한 여지를 남겨준 덕분에 차근차근 곱씹어가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세상과 시대에 대한 께름칙하고 미심쩍은 느낌을 달고 살았던 나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독서였다.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것은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접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아직 명료하게 포착되지는 않지만 심상찮은 역동성, 꿈틀거림, 읊조림들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에서는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쳤다. 책에서 소개된 25명의 학자들과 이들을 소개한 학자들의 저작들도 앞으로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온갖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것이 없다. 엄혹한 현실의 막막함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는 이들의 구불구불한 이로도 결국에는 막다른 끝에 이르러 그저 터무니없이 실패한 이야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무기력감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유와 사상의 힘을 믿으려 한다.

  18세기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어느 교수의 고요한 서재에서 피어난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할 수 있다."는 말로 사유의 힘을 역설했다. 나는 그와 반대로 '우리의 문명을 구원할 사유가 지금도 어디선가 고요히 피어나 자라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을 제때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작년 9월부터 올 3월까지 문화일보에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시리즈를 보완하여 엮어낸 책이다. 그래서 책을 굳이 구하지 않더라도 아래 링크에서 문화일보 연재분을 읽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피곤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http://www.munhwa.com/news/series.html?secode=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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