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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원 Oct 21. 2020

우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 같은데. 

공감각(Synesthesia)은 한가지 물리적 자극에 서로 다른 감각기관이 동시에 반응하는 현상을 말한다. 소리를 들으면 색깔이 보인다거나 글자를 보면 맛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감각의 세부 종류는 수십가지가 넘는다는데 인류의 1-4%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로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보통 남들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각에 대한 책, The Frog Who Croaked Blue 에 자신/타인이 공감각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몇몇 소개되어 있다. ‘분명히 70이 아니라 40이었어. 왜냐면 따듯한 느낌이 나는 빨간색 숫자였단말야.’ 라거나 ‘아니, 그 밤색 말고 저 흰색 소리내는 벌레는 이름이 뭐야?’


공감각이란 증상을 학계에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인물들은 그들이 남긴 작품이나 글로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칸딘스키, 파인만, 나보코프, 비트겐슈타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공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파인만은 저서 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에서 자신의 증상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When I see equations, I see the letters in colors – I don't know why. As I'm talking, I see vague pictures of Bessel functions from Jahnke and Emde's book, with light-tan j's, slightly violet-bluish n's, and dark brown x's flying around. And I wonder what the hell it must look like to the students’.




우리는 알파벳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읽지만 확연히 다른 (크기, 색깔) 알파벳이 나타나면 갑자기 그 형태를 인지하게 된다. 

파인만처럼 숫자나 알파벳과 색이 연계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색환각(chromesthesia) 중에서도 색청(色聽, coloured hearing), 즉 음악을 들으면 색이 보이는데, 이는 공감각 중에서 상당히 일반적인 케이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게 ‘C: 검은색, D: 살색, E: 연두색, F: 갈색, G: 흰색, A: 주황색, B: 보라색’이다. 음이 플랫이 되거나 장조가 단조가 되면 명도가 낮아진다. 예를 들어 Eb은 풀색이다. 그래서 <마술피리>나 베토벤 3번을 떠올리면 동시에 밝은 풀색이 보이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서)곡을 ‘옛다, Eb!’ 하며 Eb 화음을 듣는 이의 얼굴에 철썩 던지는 것으로 음악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에서 들은 <라인골트> 서곡은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축복받은 경험이었는데 더블베이스로 시작해 오케스트라가 겹겹이 라인강의 물결을 Eb 아르페지오로 쌓아올리는 내내 지하에 묻힌 오케스트라 피트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극장 전체가 풀색의 촉촉한 물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투명한 풀색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고 세상에 없는 색인듯 고와 영원히 서곡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색청이 있다는 것은 최소한 매우 재미있는 일이지만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항상, 혹은 듣는 내내 계속 색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 현상이 일관성이 있다거나 논리적인 것도 아니어서 내가 음악을 듣는 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같은 음악을 들어도 남들보다 자극이 복합적이니 음악을 듣다가 지겨워지면 음악을 듣지 않고 음악이 보여주는 색에 집중한다거나, 특정 음악을 기억해 낼 때 색의 도움을 받거나 하는 정도이다. 나는 Eb 음정과 Bb 음정을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도 풀색과 짙은 보라색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일상에서 사소한 불편을 겪을 때도 있다. 예를들면 얼마전 길을 걷다가 갑자기 G 장조로 크게 시작하는 음악을 듣고 흰색이 너무 강하게 보여 눈을 질끈 감고 길 한가운데 한동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이 심한 사람은 아예 운전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음악이라는 청각적 자극을 통해 시각적 자극까지 덤으로 얻는 색청과 반대로 Amusia (실음악, 失音樂)은 음악의 핵심정보 - 음정를 인지하지 못하는 장애이다. 일종의 청각적 색맹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인류의 2-5%의 사람들이 (정말?) 실음악을 겪고 있고, 이들은 서로 다른 음정 - 즉 멜로디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노래나 악기연주 등과 같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음악이 의미없는 소음의 연속으로 들린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음정을 구분하지 못하면 음정을 사용한 모든 음악적 장치들 - 예상, 진행,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긴장, 긴장의 회피, 계류 혹은 해결 같은 것들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이들은 어떤 음악가들이 음악을 틀어놓은 식당을 피하는 것과 같이, 그러나 정반대의 이유로 음악, 즉 소음을 피하게 된다고 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음악을 피해야 한다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닐 터이다. 더 나아가 중국어처럼 성조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언어의 경우 음악은 둘째치고 말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니, 역시, 악마, 디테일.


Chromesthesia인 사람 C와 Amusia인 사람 A를 한 방에 넣고 베토벤 3번을 들려준다면 C와 A는 서로 전혀 다른 소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베토벤 3번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음악의 이해도와 전혀 무관하게 C와 A의 뇌가 해독할 수 있는 물리적 정보량부터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파인만이 ‘학생들에게는 이 수식이 도대체 어떻게 보일까’라고 궁금해 했듯이, A와 C는 각각 ‘저 사람에게는 이 음악이 어떻게 들릴까’하고 상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지만 평생 A는 C가 듣는 음악을 들을 수 없고, C는 A가 듣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산다는 것은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커버 이미지는 Peter Keler의 Bauhaus Wiege. 바우하우스 요람. 왜 이 글에 이 이미지가 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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