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도 노산도 이런 노산이 없다.
둘째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왔지만 1년의 시간이 지나고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계획임신의 단점은 스트레스와 반복된 실망감이다. 연초에 먹은 결심이 12월이 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스트레스다. 나이도 나이이고, 후회 없는 끝을 위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난임병원을 예약했다. 예약의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생리예정일 3일 차에 예약해야 필요한 검진을 한 번에 다 할 수 있다. 마침 해외 출장 일정이 잡힌 남편의 출국 하루 전날이었다. 예약을 완료하고 휴가도 냈는데, 하필 그날 저녁에 회사 회장님 초청 저녁식사날이랜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한다. 일정이 엉망이지만 대안이 없는 날이다. 따지고 말게 없다. 그냥 해야 하는 거다.
이 와중에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날짜를 맞춰보려 시도를 하다가 우연히 인스타툰에서 “행운의 배테기“라는 언급이 된 걸 보았다. 비교적 규칙적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보니 스마일리더라는 어플과 연동되는 배란테스트기였다. 행운까지 온다니. 그럼 뭐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지. 이번엔 배란테스트기도 써보기로 했다. 배란테스트는 임신테스트기와 달라서 며칠에 걸쳐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 시간도 동일한 시간이어야 하고, 공복이어야 하고, 테스트기 사진 찍는 시간도 직후가 아니라 10분이 지나야 한다. 임신테스트기에 비해 몇 배는 까탈스럽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내가 인지하고 있는 배란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리일을 기록하는 어플을 몇 번 바꾸면서 어플이 뭔가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터라. 그래서 추천(?) 받은 테스트기를 사용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병원 예약일이 드디어 다가오는 와중에,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딸을 가졌을 때의 몸의 변화와 비슷한 느낌들이 반복되었다. 생리시작일까지는 아직 여러 날이 남아있지만 얼리테스트기를 가져와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맞았다. 박하기 이를 데 없다고 유명한 브랜드인데 색이 제법 진하다. 새벽 2시. 문득 일어나 체크한 테스트기가 두줄이었다.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눈앞에 테스트기를 들이밀었다. 둘 다 멍했는데 배시시 웃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우린 이미 봄에 두줄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두줄이 영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일단 모든 건 병원에 다녀와야 할 일이다.
예정일까지 미처 기다리지 못한 성질 급한 나는 예정일 하루 전에 병원에 다녀왔다. 피검사를 했고 호르몬 수치가 250이 나왔다. 지난번에는 10이었는데. 임신을 했다고 말하기도 참 난처한 수치였는데 주수를 감안하면 매우 안정적인 수치로 보였다. 의사의 반응도 심플했다.
다음 주에 오셔서 착상 잘 되었는지 초음파 바로 보면 되겠네요.
됐다는 이야기다.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난 난임병원 예약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날 드디어 집이 계약되었다. 6개월 동안 최소 60팀이 집을 보러 왔었는데 그중 한집이 드디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이가 왔고, 집이 팔렸다. 올해의 최대 숙원사업 2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행복했다. 문자 그대로 행복했다. 축하드립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구나 싶었다.
진즉 배란테스트기를 써볼걸 그랬다 싶었다. 과학의 힘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거 하나를 못해 1년을 마음 졸였다. 임신테스트기를 쓰기 전,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우리 동네 산부인과'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게 뭐 딱히 뭔가 준비를 하는 것과는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팁이 될까 싶어 하나씩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의사들의 임신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어느 영상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시샘하면 아기 생기잖아
그랬다. 딸아이 때도 그랬다. 왜 그렇게 인스타에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임밍아웃'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두어 달 했던 것 같다. 약간 욱했었다. 왜 남들은 저렇게 쉽게 되는데, 나는 노력을 안 해서 그러나 화가 나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아이가 생겼다. 요즘, 왜 나만 빼고 다 아이를 갖나 하는 생각을 요즘 딱 하던 차였다. 여자들이 친구들이 생리를 시작한다는 걸 듣게 되면 생리주기가 빨라지기도 하는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몸도 누군가를 시샘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은 고작 4주고 너무 극초기라 어른들께 이야기하기는 좀 민망한 상황이지만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아이가 임신사실을 모르면 아이가 안아달라고 하거나 업어달라고 할 때 대응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어른들께 이야기를 안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언제까지 비밀이라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좀 그랬고. 그래서 초음파를 보고 온 다음에 아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거 보여? 이 회색 안에 까만 점? 이거 뭔지 알아? 이거 아기다?라고 이야기하니 순간 눈물이 맺히며 세상 감동한 얼굴로 날 안아주며
엄마 고마워
라고 했다. 1년 내내 아가동생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딸이다. 아기가 그저 이쁜 인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우리 중 가장 간절하게 아이를 원했고, 그걸 입밖에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 배에 손을 올리며 진짜 여기 아가동생 있냐고 물었다. 아직은 만져도 표 안 날 정도로 아주아주 작아. 깨알만큼 작아 설명해 주니 다시 나를 안아준다. 나는 아이가 있음으로 예전처럼 바닥에 있는 너를 안을 수 없음을, 엄마의 몸이 약해졌음을, 상봉식도 세게 할 수 없음을 설명했다. 상봉식은 어깨만 살짝 안아야지, 막 달려와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지면 안 된다고 말하자 상봉식은 이렇게 하는 거냐 다시 보여주며 아주 살짝 포근하게 날 안아주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멀리서 뛰어와 꽉 안아주는걸 우린 상봉식이라고 부른다. 아이에게 엄마가 집에 돌아왔음을 알리는 우리만의 리추얼이다. 그걸 안 할 수는 없지만 약하디 약한 아가동생을 위한 배려를 하나씩 시작한 것이다.
아이는 어린이집에도 비밀로 하자는 나의 말을 잘 지켜주고 있다. 성수동 할머니에게는 엄마가 말할 때까지는 비밀로 해줘, 구성 할머니에게는 아빠가 돌아온 다음에 아빠랑 같이 이야기하게 기다려줘. 부탁하고 저녁시간을 보냈다. 어린이집 문을 나설 때면 내 무릎과 다리를 아주 살짝 끌어안는다. 어린이집 안에서는 폴짝거리며 뛰어오다가도 내 앞에선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다가온다. 배 위에 누울 수 없다는 말에, 배와 가슴이 아니라 다리 위로 올라가 배에 머리만 살짝 기대어 잠들곤 한다. 너무나도 훌륭하게 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는 자기가 다 키워준단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할꺼란다.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려와 나를 다시 한번 감동시켰다. 늘 색종이에 엄마라고 그려서 주곤 했는데, 어제는 내 그림 안에 전에 없던 작은 점이 있다.
그게 아가동생이란다. 매일매일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이렇게 세심한 아이를 딸로 맞이하는 축복을 잊고 있었다니. 하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아이가 생긴 기쁨만큼이나 품 안의 아이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요즘이다.
아이가 왔다는 사실을 안 바로 다음날, 6개월간 푸닥거리하던 집이 팔렸다. 6개월 간 60팀은 보고 간 집이다. 40집 이상은 봐야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렇게 아이는 큰 행운을 몰고 왔고 우리는 고민 끝에 아이의 태명으로 '또복이'로 하기로 했다. 행운을 가져온 아이. 그 자신이 행운일 아이. 우리에게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줄 아이.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동생의 태명을 직접 지어보라고 이야기했지만 거기까지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고, 다복이와 또복이 중 선택하라는 말에 아이가 고른 이름이 또복이였다.
내년이면 나이가 45세가 되고. 나는 그렇게 둘째 또복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 험란한 저출산 시대에 우리 가족은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