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아무튼 서럽다
임신하고 낮은 굽으로 바꾸고 미끄러지는 것을 조심하는 건 단순하게 넘어졌을 때 아이에게 가해지는 충격이 커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타박상이나 심한 경우 골절을 당한다 할지라도 쉽게 처치가 어렵다. 일단 엑스레이를 찍는 건 아무리 배를 납으로 가린다 해도 부상당한 부위가 허리나 골반일 경우는 무쓸모다. 약도 함부로 쓸 수 없고, 쓴다 하더라도 제한적이다. 강력한 약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고 검증된 약도 가능하면 안 쓰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예쁜 거만 먹으라는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 태교로 눈이 즐거워라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상한 과일이나 식재료를 거르는 기준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못난이 과일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양이 우그러지거나 변하면 맛도 형질도 변하게 마련이다. 배탈이 나도 약을 쓸 수 없으니 애초에 배탈을 방지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 임신은 그런 것이다. 모든 순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아프지 않게 10개월을 버티는 것. 하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니 첫아이 때는 그게 디스크였고, 이번엔 감기였다. 사실 전조증상이 좀 있었다. 감기기가 오기 이틀 전에 급체를 했고, 오밤중에 구토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그게 좀 나아질 무렵 감기가 왔다.
환절기에는 비염, 감기가 골고루 오는 편인데, 심해지면 축농증까지 가서 항생제도 피할 수 없다. 기침과 콧물이 심하다 싶으면 일단 이비인후과로 달려가던 나다. 그런 내가 임신을 했고 이사 스트레스와 바뀐 잠자리, 현저히 떨어진 면역이 나에게 감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나는 안다. 환절기 감기와 비염엔 무조건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약을 먹지 않으면 이게 한 달이 갈지 두 달이 갈지 아무도 모르는데 결정적으로 그렇게 장기화되면 재채기와 코막힘, 콧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고 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증상이 심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휴가를 내고 이비인후과로 갔다. 여의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좀 독한 약은 쓰지만 그래도 이비인후과에 의사만 3명이라 노하우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속 다니던 이비인후과에. 예약을 하고 의사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의사에게 증상과 증상이 발현된 시기를 설명하고 뒤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가 임신 중입니다.
의사의 표정이 미묘하다. 안타까움에 가까운 얼굴로 보였다. 코 속을 보고 다행히 부비동염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시며 콧속에 쌓여있는 콧물을 한바탕 빼내고는 이야기하시는 게 코세척 해봤냐. 였다. 코세척. 이미 병원을 오기 전에 한바탕 봤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병원을 찾은 임신한 사람들이 받았다는 유일한 처방. 코세척. 정말 그거 말고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그래도 저 병원이라면 어떤 노하우가 잇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병원에 갔던 터였다. 결국은 코세척밖에 대안이 없다는 것은 약 처방이 불가능하다는 말 아닌가. 코세척을 꾸준히 하면 좋아질 것이라는 걸 몰라서 간 게 아니다. 그건 어디서든 살 수 있는 것이고 좀 더 빠른 효과가 있는 다른 묘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병원행이었다.
임신 중에 먹을 수 있는 약에는 등급이 있어요. A, B, C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는데 보통 임신 중에 안전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A와 B등급이에요. 코에 뿌리는 약도 엄밀히는 C등급이고요. 그러니 뿌리는 약도 좀 처방해 드리기가 조심스러워요.
예상했다. 임신 중에 약을 먹어본 적이 없어 몰랐다. 등급이 있다는 것은. 이비인후과약은 좀 센 편이었고, 먹으면 잘 듣는다는 말은 세다는 말과 같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역시 대안은 없었다. 허망하게 코세척 처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 갑자기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몸살기가 오기 시작했다. 코감기로 몸살까지 가는 일은 드문데 이상하다 싶었다. 혹시나 싶어 체온을 쟀는데 체온계에서 38도가 나왔다.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체온계에 38도가 넘기는 걸 자주 본 것도 아니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뭔 일 있겠나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했는데 임신 기간 중에 38도를 넘기는 것은 약을 먹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당장 응급실을 가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이미 시간은 늦었고, 샤워라도 하고 그러면 좀 체온이 떨어질까 싶어 샤워도 해보고 했지만 크게 변화가 없었다. 응급실로 당장 달려가라는 카페의 글들이 보였지만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렇게 움직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이는 남편이 케어하고 나 혼자 응급실에 간다?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응급실에서 등록도 내가 하고 처치도 내가 받는다... 이 또한 무리다.
나는 아이를 분리시키고 새벽에 수시로 깨 가며 체온을 쟀다. 조금씩 체온이 내려가는 듯하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연차를 내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래도 여긴 낫지 싶어서 한 선택이 다니는 산부인과에 가는 것이었다. 산부인과에는 뭔가 다른 대안이 있겠지 싶었다. 다들 응급실이 아니라면 산부인과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고 오라는 글들이 여기저기 산적해 있었다. 접수를 하러 가니 같은 병원 안에 있는 가정의학과로 연결을 해준다.
의사는 나의 증상과 상태를 이것저것 묻고, 배탈은 없는지 등의 증상도 확인했다. 독감일 수도 있으니 검사를 하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했다. 독감약은 먹어도 되는 약이 있고, 독감일 경우는 처방도 달라지니 한번 해보기로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코감기로 발열까지 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 명확한 병명은 알 수 없으나 바이러르성 감염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지만, 혹시 장염이나 다른 증상일지 몰라 이것저것 물으신 것이라 했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고, 산부인과 병원에서 운영하는 가정의학과라 A, B등급 약 리스트가 확보되어 있다고 했다. 처방 가능한 약은 사실 심플하다. 타이레놀과 코감기 다스리는 약. 그리고 한 단계 강도가 떨어져 있는 액상 약.
그걸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이 증상은 오래가면 갈수록 삶이 피폐해지고, 콧물과 코막힘이 장기화되면 가래로 이어지고 이게 기침으로 가면 어차피 복압이 올라가 아이에게 좋지 않다. 뭐로 가든 약 없이 감기를 길게 가져가는 것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좋지 않다. 병원에 가겠다는 날의 말에 약 먹어도 괜찮겠냐고 다시 묻는 팀장님을 보며 감기로 고생하느니 약이 낫죠 하고 답했다. 아마 누군가는 약을 먹지 않고 참고 또 참을 거다. 그 약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무서워서. 하지만 병원에서 검증한 약이라는 말을 믿고 나는 거침없이 약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거의 대부분의 증상은 사라졌다.
임신한 사람도 약은 먹을 수 있다. 디스크로 진료는커녕 접수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해본 나로서는 이를 통해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사흘 아플 거, 약 먹으면 3일 아프다는 말도 잇지만, 그래도 그 증상이 유지되는 기간이 나에게 어떤 후폭풍을 주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극초기는 지난, 14주 차의 일이었다. 괜찮을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나의 아이는 이 모든 순간을 견디고 건강히 태어날 것이라고 배를 쓰다듬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프지 말아야지. 옷도 더 두텁게 껴 입고, 따뜻한 물도 계속 들이붓고 있다. 또 아프면 정말 귀찮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