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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Mar 22. 2024

눈이 밝은 아이

나의 아이는 생각이 많다. 며칠 전 저녁 우연히 어린이집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린이집 문이 열려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그걸 차 안에서 발견했고. 그날은 주말이어서 어린이집의 영업시간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타이밍이었다.


엄마 어린이집 문이 열려있어
누가 어린이집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갔나?
엄마가 걸어가면 무섭다고 하는 그거. 놓으러 누가 온 게 아닐까?


그렇다. 나는 큰 놀이터라 부르는 키즈카페에 있는 거대한 에어바운서를 힘들어한다. 걸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리는 것도 힘들고 그로 인해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아이는 그 거대한 에어바운서 안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쓴다. 걷기조차 힘든 그곳에서 뛰는 아이라니. 내가 저렇게 활동적인 딸을 낳았다니. 아무튼 나는 딸의 에너지를 따라갈 재간이 없고, 울렁거리고 불편한 마음에 밖에 나왔다가 엄마가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며 성화를 해 한번 대단히 혼이 난적이 있다. 엄마는 무서워서 저 안에서 걸어 다닐 수가 없다는 말을 몇 번씩 반복했음에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당장 이 즐거운 시간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였을 테니 말이다.


그때 걸어 다니기 힘들었던 그 에어바운서가 조만간 어린이집에 들어올 예정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그런 소소한 순간들을 다 캐치하고 기억한다. 영상에서 봤던 동물에 대한 정보도 다 기억한다. 엄마가 파충류를 무서워하니 파충류가 나오면 화면을 가려주며 "엄마 보지 마!"라고 외칠 줄도 안다. 확실히 나에 비해 훨씬 더 섬세한 아이이다.


눈이 밝은 아이다. 보고 들은 것을 잘 담아두는 아이이다.


그런 섬세한 아이에게 동생의 존재는 매우 특별한 것일 터. 동생으로 인해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을 수시로 해주어 아이의 불안감을 없애는 것이 나의 요즘의 미션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안다. 엄마를 달려와 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 위에 올라가 누우면 안 된다는 것을. 엄마한테는 그 모든 것이 힘든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빠르게 학습했다.


우리는 이사를 앞두고 있고, 우연히 이사 갈 집들을 아이와 함께 둘러보게 되었다. 본격 이사에 앞서, 2년간의 월세살이가 불가피했고, 우리는 월세살이를 할 집을 보러 다니던 중 마지막집을 아이와 함께 보러 가게 되었다. 아이는 지금 집도 본인의 할머니 집에 비해 작다고 투덜대곤 했는데, 지금 집의 절반도 채 안 되는 크기의 집으로 이사 가는 것에 대한 반감이 없다. 집 바로 앞에 놀이터는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에 차도 많고 위험요소도 많다. 삶의 환경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에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집이 작아질 거야. 한 2년 정도. 괜찮아?


몇 번을 물어도 괜찮다고 한다. 직접 보고 왔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를 수 있어도 본인이 뛰어다닐 공간이 현저하게 작아진 것은 알 수 있을 정도의 차이이다. 본가에만 가도 집이 커서 좋다고 말하는 아이가, 자신이 매일을 보낼 공간이 작아졌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이는 수긍하고 있다. 작은 집으로 이사 갔지만, 너의 어린이집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말에 더 기뻐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사청소를 마치고 빈 집을 보러 갔다. 여기가 너의 방이야! 전보단 좀 작아졌지? 이야기해도 전혀 동요가 없다. 그저 새집이라는 것 자체가 마냥 신나 한다.


나는 나의 모든 걸음이 나와 나의 가족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내 어떤 선택이 아이의 삶을, 그리고 나의 모든 가족의 삶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집을 팔고 사고, 경제적 수익을 남기고 그 모든 것 위에 가족의 안전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비록 2년간 임시로 가있는 집이라고는 하지만 생각이 많고 보는 눈이 밝은 나의 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지금은 모른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건강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인가.


75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4개나 버렸음에도, 또 이사 와서 2개를 더 버리고도 아직 버릴 것이 산처럼 있는 나의 집은 집은 어수선하고 매일매일 조금씩 버리고 정리하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집에는 눈이 밝은 아이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나, 그리고 언젠가 눈이 밝은 아이만큼만 건강하고 똑똑하기를 바라고 있는 작은 생명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큰 아이는 누구보다도 행복해했고, 가장 기뻐했지만 엄마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에 대해서는 학습된 바가 없다.


아주 막연하게, 엄마에게 아기가 생겼고, 그 아기가 매우 약하고, 약한 아기를 보호하다 보면 엄마도 위험해지기 쉽다. 그러니 엄마가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확실하게 각인된 것 같다. 평소에 다니던 소아과가 2층이라 늘 계단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선택을 하던 아이가 웬일로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하는 것이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냐 물었더니


엄마가 또복이 때문에 힘들잖아


이렇게 아이는 시시때때로 나를 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마와 동생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마냥 뿌듯하고 고마운지 한 2달쯤 지났을까... 아이에게 미묘한 감정적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 서러워하고, 섭섭해한다. 아기로 인해 엄마가 너를 안을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했음에도, 안아달라는 말을 부쩍 많이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안아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고.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패턴의 행동과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하고 또 사소한 이유로 묘하게 삐져있던 어느 날.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요즘 자주 섭섭하냐고. 혹시 또 복이 때문에 엄마가 너를 안아주지 못해서 속상하냐고. 그랬더니 조용히 등을 보이며 끄덕였다. 꼭 아이가 아니어도 이미 1미터를 훌쩍 넘긴 큰 키라 이제 키가 커져서 못 안겠다는 말을 종종 해왔다. 하지만 귀도 눈도 밝은 아이는 자기를 안아주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커진 키 보다는 아기 때문임을 잘 안다. 엄마가 힘들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긴 6살 소녀는 엄마에게 맘껏 안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속상했던 것이다.


안아주기 어려운 건 아기 때문에 아니라 네가 키가 커진 큰 언니라 그래
그러니 안아주는 거 말고, 업어줄게

엄마와 같이 저녁을 먹는 날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의 막연한 걱정이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그랬단다.


엄마가 또복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를 많이 안아주었으면 좋겠어
또복이 나오면 나 안아주기 힘들잖아


아직도 함께 자고, 자다 손을 뻗어 더듬었을 때 내가 없으면 자다 깨서 나를 찾는 아이다. 엄마가 힘들까 봐 좋아하던 계단도 참던 아이가 동생으로 인해 자신이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호르몬 변화로 인해 새벽 2~3시면 꼬박꼬박 깨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내 목을 팔로 감싸고 있다. 그렇게 엄마를 꼭 안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옆에 안 누워 있으면 화를 낸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고작 저녁 시간뿐인 것을 잘 아는 터다.


오늘도 그렇게 눈을 뜨자마자 업어줘를 시전하고 업어서 식탁에 옮겨주니 내 몸에 고개를 파묻는 아이. 나한테 1번은 영원히 너라고 말하면 좋아 씩 웃으면서도 동생이 1번이 아니라고 하면 동생이 속상할 테니, 동생에게도 1번을 달라는 아이. 그렇게 눈이 밝고 사랑이 많은 아이가 내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매일매일 되새긴다.


너만큼만 건강하고 너만큼만 순한 아이가 나오면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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