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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Mar 23. 2021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문득 생각났다. 2년전의 대화가.

무료로 진행하는 수업 하나를 듣고 싶었다.  수업의 퀄리티도 높고, 1년간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체계적이었다. 프로그램이 마무리되기 전에 해외 연수의 기회도 있었다. 무엇보다 비영리 섹터의 중간관리자를 위한 프로그램 구성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나의 멘탈은 너무나도 필드의 '손발'에 있어서 마인드 리셋을 하고 싶었다. 석사를 마치고 2년의 시간을 방치하다시피 보내면서 이렇게는 더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해야 했다. 당장 집에 들어가는 각종 대출금 상환 등등을 고민하면 돈을 크게 들여서 하는 수업도 무리였다.


1주일에 2번, 매번 3시간 이상의 수업을 6개월 이상 들어야 하고, 중간중간 워크숍도 있지만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할애할 의지가 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우리 집 큰고영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좋은 기회면 해봐야지 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차 지원서는 아주 간단한 현 위치 파악 정도의 심사였지만, 2차 지원서는 지원동기과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쓰는 단계였다. 진짜 서류전형은 2차였던 거지. 1차는 무리 없이 통과하고 2차 지원서를 보다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기관장의 참가 동의서였다. 주 2회의 수업은 하루는 4시, 또 하루는 6시에 시작한다. 당연히 업무시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기업에서 무료로 프로그램을 개발해 교육을 지원하는 만큼, 그 지원이 의미 없지 않도록 80% 이상의 출석을 보장하도록 조직 안에서도 협조를 하겠다는 뜻을 담은 동의서였다.


난감했다.


나는 지금 적지 않은 일을 하고 있고, 늘 업무량에 허덕거리고 있었다. 엄밀히는 야근을 하면 스무스하게 흘러갈 일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야근을 피하고 낮에 혼을 놓고 일을 굴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낮에 2시간의 공백이라는 걸 위에서 납득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야근을 하더라도 이 수업은 꼭 듣고 싶었기에 기관장에게 동의서를 들고 들어갔다.


나는 할머니 상의 소식을 출근길에 들었고. 그럼에도 출근을 했고, 하던 업무를 하루면 어찌어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류제출일은 3일이 남았고, 나는 오늘 무조건 동의서를 받아야만 했다.  


너무나도 예상했던 대로, 생각 좀 해보자며 난색을 보였고, 나는 그 말에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나왔다. 생각을 어떻게 할지 너무 알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아이가 생기면 이런 수업을 들을 기회는 더 안 올 거 같으니 애 생기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다고 읍소 아닌 읍소를 했다.


우리 회사는 다해서 17명이다. 다들 각자의 전문분야가 있고, 그 분야에 충실하다. 그 말은 나의 전문 분야는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해는 한다. 업무에 영향을 분명히 준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도 이미 2명의 참가자가 있었고,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기관장이 바뀌고, 나는 그 전 2명과는 다른 입장에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나를 부른 기관장은 '지금도 너는 업무가 과중하다.', '넌 이미 대학원도 나왔으니 더 이상의 공부는 불필요해 보인다','니가 지금 업무에 충실하면 언젠가 팀장이 됐을 때 더 힘을 받을 거다'(이미 17명 중 1명이 기관장이고 3명이 팀장인 이 상황에서 무슨 팀을 또 만든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많은 이유들이 쏟아졌고 특별히 반항할 의지는 나에게 없었다. 내가 알았다고 대답을 해도 그의 항변은 이어졌다.


'한 기관에서 연달아 3명을 보내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니가 아이 생기기 전에 공부를 해보겠다는 의지는 알겠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나중에 또 기회를...'.


응? 난 순간 잠시 머리가 멍해졌아.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장황한 항변의 결론은 니가 임신을 할 거라고 하지만 그게 내년이 될지, 후년이 될지 모르니 어차피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거 아니냐는 거다. 애가 언제 생길 줄 알고 걱정을 미리 하고 있냐는 거다.


오늘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보였다. 나이 마흔. 결혼 2년차. 아직 아이 없음. 사회적으로는 낮은 출산율에 기여하지 않는 매국노 취급을 당하지만, 업무적으로 필요하면 나의 아이는 언제든 미뤄질 수 있는 존재였다. 참 편리했다. 애가 없는 기혼여성은 어디서나 불리하다. 정규직에 취직하면 특별한 고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왜 안 생기냐는, 혼수는 해가냐는 유치한 질문에도 담담해야 하고 두통이나 구토 증상에 임신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나는 정작 그들이 필요할 때는 아이는 후순위로 밀린다.


맞다. 맞는 말이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아이는 신의 뜻이니까. 언제 생길지 모르는 거니까. 그래. 나는 이런 시답지 않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넘겼다. 퇴근을 하고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준비를 하면서 문득 눈물이 났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 대한 슬픔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출근한 내 꼴이 우스워서였는지, 그럼에도 출근한 그 하루에 그런 시답지 않은 말을 들은 내가 불쌍해서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시덥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어찌 생각하면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듣고, 어차피 안될 일을 감당했을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괜한 소리를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겼으면 아이 핑계로 거절될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까지 가지고 무리하지 마라....


하지만 나는 출산 하루전까지 만근을 했고, 휴직에 들어가서도 육아와 글쓰기를 병행했다. 하고자 하면 해내는 사람이고, 나의 그 오기를 그는 몰랐다. 그리고 그런 자잘한 순간들이 점점 이 조직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도 아마 모를 것이다. 복직을 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으니. 이 몹쓸 기억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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