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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Jul 08. 2020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요양보조사와 1년반, 요양병원에서 6개월을 지내시다 월요일 아침 한끼 든든히 드시고 비교적 편안하게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올해 94세이시다. 낡디 낡은 할아버지의 지갑에서 발견한 신분증. 거기에 찍혀있었다. 27년생. 그렇게 생경한 숫자는 처음이었다. 

나에게 얼굴에 사마귀가 한가득인체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어려서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커서는 안타까움과 분노의 대상이었다. 외모때문에 평범한 사회생활은 어려웠고 그 분노는 고스란히 가족들을 향했다.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엄마의 배움의 기회를 박탈했으며, 평생 아들딸을 불신하며 사셨다.


어려서는 징용도 다녀오셨다고 했고, 어렴풋이 쉽지 않은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케 하는 살림살이였다. 엄마가 자라온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는 외할아버지는 늘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게 다 할아버지때문이라는 원망, 외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엄마는 저렇게 안살았을것이라는 원망. 그게 내가 할아버지에 대해 갖는 가장 큰 감정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여러모로 쓸쓸했다.


시립병원에 빈소를 차리고 나니 장례식장 입구 한켠을 막아 만든 선별진료소가 눈에 띄었다. 친척들에게 소식은 알려야 했지만 문상은 만류 해야했다.

8형제에, 그글의 아내들과 자녀들, 다시 자녀의 자녀와 가족들이 수십명 모여 시골 잔치 같았던 친가의 장례와는 천양지차였다. 엄마와 외삼촌 둘뿐이었고, 연락하며 지내던 친척분들은 연락이 끊어졌거나 돌아가셨다. 띄엄띄엄 오는 손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2박 3일을 보냈다. 예상만큼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입관식을 하며 우리식구 중 유일하게 아이고를 외치며 엉엉 운건 엄마뿐이었다. 나나 동생의 아내가 눈물을 흘렸던건 아마도 그런 엄마를 보고 있어서 였으리라.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렇다할 좋은 기억이 없는 나는 다음생엔 더 좋은 삶을 사시라고 우는 엄마가 더 마음이 아팠다. 

처음으로 화장터에 갔고, 문자 그대로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분해가 되어 자연과 한몸이 된다는 단지에 감겨있었다.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추모공원 건물 안에는 곡소리로 가득했고 도저히 못듣겠어서 건물 밖을 나와있었다. 나도 나의 가족을 보냈으나 그들처럼 처절하게 울지 않는 내 자신이 좀 이상해보이기도 했고, 그 감정들에 온몸을 내놓는 것이 너무 힘들기도 했다. 


장지에 모시고 올라가 매장을 하고 제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찌 해드릴까요. “수목장이지. 썩어져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사체에서 가능한 모든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하셨던 아빠였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마음에 새롭게 남았다. 


돌아가신 날도, 돌아가신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엄마의 처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일상적인 통화를 하면서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더 잘 할껄 그랬나봐. 더 잘해줄껄"이라며 울먹였다. 엄마는 충분분히 잘했다고 답하고 끊었고, 역시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마는 엄마에게  평생 가혹했던 할아버지의 말년을 최선을 다해 지켰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도 돌봐야 했고, 아빠는 사위이기 보다는 큰아들 같이 버텨왔다. 그냥 두면 10억짜리 아파트가 생길 재개발 지역 집을 굳이 헐값에 생판 남에게 팔아넘겼어도 우린 담담했다. 화는 났지만 그래도 놀랍지는 않았다. 외할아버지라면 응당 그럴만 했다.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당신을 곁을 지켜온 딸과 사위의 말보다 쌩판 남의 말이 더 귀하던 분이었고, 그걸 어린 나도 알 정도 였으니까. 


비뚤어진 자존감으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만, 그래도 우리 엄마에겐 단 하나뿐인 부모였던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허망하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아프지 않게 짚풀 꺼지듯 사그러지듯 죽고싶다던 말처럼 그렇게 아프지 않게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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